오덕의, 오덕에 의한, 오덕을 위한…

김해인, PUNCH

by 담화

사실 아니다, 오의 두배수오리… 를 표방해야 더욱 마땅하리라 생각하지만, 나도 가끔은 연식과 체면이란 것을 챙긴다(그럴 리가). 그렇다고 하자.

하루 만에 이 책을 다 읽고, 미친 듯이 포복절도하기를 여러 번 했다. 고등학생인 둘째가 늘 말하기를 자기들 중에서 엄마의 유전자를 가장 뚜렷하게 물려받은 것은 본인이라고 하는데, 그 유전자란 외적인 유전 형질도, 습관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기질적인 것도 아니다. 무려 오타쿠적 취향의 유전자라고나 할까. 물론 세상엔 그런 게 없지만 아니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혹시... 그 옛날 「슬레이어즈(마법소녀 리나)」를 보느라 초저녁에 귀가해서 TV 앞에 들러붙어 있느라 엄마에게 등짝을 여러 번 얻어맞았던 내가 아니던가... 아니 그러니까 그런 취향이 다 얘한테 갔다고? 그건 그거대로 아찔한데.

아무튼 내가 아이를 불러 이 대목을 낭독해 주었을 때


고죠는 잘생겼다. 진짜 잘 생겼는데 그 잘생긴 얼굴 중에서도 가장 잘생긴 눈을 안대로 가리고 다닌다.
(...)
아주 잠깐에 불과한데 그 잠깐이 끝내주게 잘생겼기 때문에 그의 잘생김은 어떠한 상태가 아니라 아주 귀한, 고귀한 순간으로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51쪽


이미 훌륭한 한 사람의 오덕으로 자라 있던 2호는 내 낭독을 들으며 응, 내가 그 마음 알지, 하듯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책이 너무 재미있었던 나머지 엉뚱한 이야기를 하느라 정작 중요한 정보를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http://aladin.kr/p/YqbOE


이 멋진 에세이를 쓰신 분은 문학동네 만화편집부에서 일하고 계신 김해인 편집자님이고, 내용은 두말할 것 없이 이분이 오래도록 사랑해 왔던 만화와, 만화와 더불어 살아왔고 이제는 그 일을 업 삼아 먹고사니즘을 해결하고 계신 성덕의 삶(=만화 편집자)에 대한 이야기여서 나도 만화 좀 봤다, 하는 분이라면 누구나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최근의 작품들을 감상하지 못하셨다면 약간의 진입장벽은 좀 있을 수도 있겠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첫 챕터를 읽고 난 나의 감상은 이거였다. 아니 이거 뭐죠. 왜 이렇게 재밌죠. 나는 이 책을 내가 쓴 줄 알았다. 만약 카페 게시물이었으면 수정 버튼을 찾았을지도 모르겠다…


「슬램덩크」의 서태웅, 「나루토」의 사스케, 「하이큐」의 카게야마 등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거쳐 「가비지타임」의 성준수에 (또) 도착한 것이다. 너희를 만나서 정말 기뻤어. 너희와의 시간은 내 인생 최고의 순간들이었어. 그리하여 성준수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캐릭터를 다시 사랑하라고 하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 -54쪽


아, 이건 정말이지 오타쿠의 심장을 울리는 웅장한 선언이다. 이게 어떤 마음이 겹겹이 쌓여 마침내 나올 수 있는 말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진심...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이 일을 하는 사람과, 그 일을 너무 좋아해서 진짜 미칠 듯이 좋아해서 하는 사람의 열정과 몰입도는 같을 수가 없고 같아서도 안 될 일이다. 실제 시장에 풀렸을 때 기대 이하의 성적표를 받아 들게 되는 한이 있어도, 작가와 함께 그 작품을 만들어나가는 편집자는 적어도 온전히 작가의 편이, 가장 큰 지지자가 되어줘야 한다. 그런 면에서, 김해인 편집자와 함께 작업하는 작가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일까.


사실 이런 말들은 다 내가 나한테 테하는 말이다. 단행본 100권이 훌쩍 넘은 「명탐정 코난」 이나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원피스」 같은 만화가 버젓이 존재하는 세상에, 부끄럽지만 나도 그들에 비견하는 세계 최고의 만화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 중이다. 다른 건 몰라도, 나도 정말로 작가님들의 만화를 좋아한다. -73쪽


더구나 요즘은 AI를 버젓이 활용해서 창작의 영역에 치고 들어올까 봐 많은 작가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때가 아닌가. 그런데 이분은 몹시도 쿨하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한국은 만화 시장 자체가 죽어가고 있다고(만화뿐일까...). 그러니까 AI도 출판 쪽은 건들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고. 왜냐면 돈이 안 되니까. 돈이 안 돼서 굳이 AI가 넘볼 이유도 없는 시장이라고 건조하게 하는 이 말이 이렇게 웃긴 동시에 슬플 수가 있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에 돈이 안 되고, 아쉽고 허탈함이 종종 느껴지더라도


힘들어. 근데 재밌어. 힘들다니까. 그래도 재밌다니까. 내 안엔 나약하고 쉽게 싫증을 내서 힘들면 바로 그만둘 준비부터 하는 내가 있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이기는 쪽은 재밌다고 기승전재미를 외치는 나다. 그럼 해야지, 어쩌겠어... 근데 생각해 보니 또 그렇다. 세상에 쉬운 일이란 게 있나. -108쪽


이렇게 추스르며 또 새로운 작품을 준비하며 편집자의 새 하루를 열어가는 것이리라 짐작한다. 응원합니다 편집자님. 재밌는 에세이 써주셔서 감사해요. 요즘 책 대방출 중인데 이 책은 기분 가라앉을 때마다 읽으려고 모셔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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