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보영, 어떤 새의 이름을 아는 슬픈 너
단편소설이 너무 어려워서 일부러 단편소설 읽기를 회피하던 시기가 있었다. 단편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서사의 두께는 이 정도가 적절하다, 이걸 지나치면 조금 곤란한데...라는 어떤 암묵적인 규칙이 있을 것이다. 그만한 볼륨 안에 들어가는 이야기들은 실제로 보이는 딱 그만큼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펼쳐보니 겹겹이 접힌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숨을 들이켜게 만들기도 한다. 후자에 속할수록 그건 풍성하고 결이 두터워 순식간에 읽어버릴 수 있는 길이임에도 불구하고 종종 독자를 미궁에 빠트린 채 유유히 도망치곤 한다.
이젠, 네가 알아서 잘 생각해 봐. 나는 여기서 이만.
그건 작가가 독자에게 생각하기를 촉구하는 의제일 수도 있고 주위를 돌아보기를 청하는 부드러운 권유일 수도 있다. 그저 혹독한 일상에 너무 지친 독자를 달래주는 즐거운 휴식이기도 하고.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이나, 단편을 집어들 때는 대체로 시간이 부족하고 뭐든 읽고는 싶고, 그렇지만 이해의 흐름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읽던 책을 마저 읽기는 곤란할 때인 순간이 많았다. 그런 까닭에 이왕이면 즐겁게 읽고 너무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단편 쪽이 좋은 것은 당연했고.
명확한 선택 기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예외는 탄생하게 마련이고 짤막하기 그지없음에도 불과 1만, 2만 자도 안 될 것 같은 그 이야기 속에 담긴, 나처럼 살아 움직이고 생각하고 뭔가를 느끼는 사람에게서 갓 베어낸 것 같이 펄떡이는 마음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경험을 하고 나면 이게 어떤 이야기일까, 고민할 생각 같은 데 시간을 쏟을 여지도 없이 단편집을 곧잘 손에 쥐게 된다.
내가 아는 감정이기 때문에, 나 또한 그런 입장이라면 당신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선택을 할 것 같아서. 텍스트의 공간에서만 존재할 뿐인 그대들을 위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이 오기 때문에.
새가 슬프다고 말하는 건 그 새를 바라보는 '너'일 뿐이에요. 슬픈 건 '너'이지 '새'가 아니니까요. 그래서 이 소설은 새를 바라보는 것에 실패한 사람의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을 쓰던 도중 종종 슬픔에 빠지기도 했지만, 슬픈 건 저일 뿐, -84쪽
어떤 대상을 바라봤을 때, 그것에 드리워진 마음이 결코 그 대상에 속한 본질이 아니라는 사실에 왜 그리 시선이 꽂혔을까. 결국 어떤('어떤', 참 좋은 단어이지 않습니까. 저는 이 낱말에 숨은 적당한 거리감과 그 모호한 대상에 부여하는, '나'와의 옅은 연결고리, 계속해서 말할 수 있는 여지를 허하는 공간감이 좋아서 애용한답니다) 글이 어떠하다라고 덧붙이는 감상글조차 결국은 그 글에 내재된 특성이라기보다는 그리 읽어낸 사람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머금고 있는 한 사람들이 함부로 말하는 일도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중년의 부부가 해외여행을 하던 중, 독일에서 홀로 거주하던 화자의 이모의 부고를 받는다. 그가 살았던 집에 발을 들이고 홀로 남은 집을 둘러보고, 그녀의 삶을 추억하고 마침내 이모를 떠나보내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는 시종일관 담담한 이 소설이 유난히 아름답게 읽히는 대목이 있다.
이모의 공간에서 화자가 결국 망자의 삶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특정한 대상에 투사하는 장면이 특히 먹먹하고 그것이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닐까 나는 어렵사리 짐작한다.
그들이 사라지는 방식은 이따금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할 일을 다 했다고 온몸으로 표현하는 것 같달까. 그는 고장 난 사물들을 수리하거나, 잃어버린 물건을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았다. 사라짐은 사물의 결정이라고, 사물마다 결말을 쓰는 방식은 다르며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 더 이상은 할 수 없다고 자폭해 버리는 순간들. 그런 사라짐을 경섭은 아름다운 항복이라고 이름하고 싶었다. -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