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난두 페소아, 이명의 탄생
1. 여기서의 이명은 귀울림이 아니라 다른 이름이라는 의미의 이명이다.
2. 내가 페르난두 페소아에게 도착한 여정은 퍽 여러 이름을 거치는데, 그 이름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김산하/김한민 「STOP!」시리즈 → 박규리 「아무튼, 딱따구리!」→ 김한민 「그림 여행을 권함」→ 김한민 「페소아와 페소아들」→ 그리고 여기.
참고로, 이 세 분은 형제와 부부관계... 김한민 작가의 책을 보다가 계속 발견한 이름이 페소아였다. 그리고 그의 기행인지, 창작의 원천인지 알 수 없던 그의 수많은 이명들. 이름만 달리 여러 개 가진 게 아니라, 그 나름의 페르소나를 모두 다르게 갖고 있었던 진정한 부캐의 천재라고나 할까. 페소아, 페르소나, 사람 정신 빠지게 하기 이보다 적절할 수가 없다... 아무튼, 페소아는 한 번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 좀처럼 빠져나오기 쉽지 않은 늪 같은 매력이 있는 작가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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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소아의 대표적 이명은 세 가지가 있다. 알베르투 카에이루(Alberto Caeiro), 히카르두 헤이스(Ricardo Reis), 알바루 드 캄푸스(Alvaro de Campos)가 그들이다. 이미 말했지만, 페소아는 자신의 부캐에게 이름과 페르소나만 적당히 설정해 둔 게 아니었다. 외모, 성격, 인생철학, 문체, 스타일, 서명과 고유한 삶의 궤적까지 보유한 '가상인간이지만 실존인물 같은' 인물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는 각자의 독립적인 작품세계까지 있다. 페소아를 알면 알수록 이런 톨킨적인 인간이 또 있구나... 싶어서 정말이지 세계는 넓고 나는 여전히 아는 게 없고 기인 천재는 많고도 많구나를 실감했달까.
그러니까 알베르투 카에이루로 말하자만 페소아의 스승 격인 인물인데(슬슬 어지러워지십니다) 자연주의를 추구하는 시인이다. 스타일주의자의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이랄까. 직관주의자적 성향도 있다. 히카르두 헤이스는 운명에 복종하는 고전주의자적 풍모를 지닌 인물이다(멀미가 납니다). 알바루 드 캄푸스는 또 어떤가! 그는 앞의 두 사람과 완전히 다른 페르소나를 지녔다. 무려 미래주의자다! 미래주의자 하면 기술과 속도를 찬양하는 감각적인 인물이다. 그 이명들로 작품 활동도 했음은 물론이다. 이쯤 되면 파격적인 시도를 한 작가를 떠나서 이 사람 뭐지... 궁금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여기서 하나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자면, A 이명으로 B 이명의 작품을 비평하는 일도 했다는 사실. ㅎ... ㅎㅎ... 한 번 더 강조하고 지나가겠다. 이 세 가지가 '대표적' 이명이었고, 물론 페소아의 이명은 더 있었다...
내가 늘 골몰하는 매우 흥미진진한 사건이 있는데 그 사건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 문제를 유발한다. 한 사람이 정작 자신의 진짜 이름은 알려지지 않은 채 가명이 불멸하는 것이다. -16쪽
선생님의 본명은 엄청나게 유명하답니다...
내 속에는, 할 수만 있다면 사람으로 만들어내서 내가 직접 얼굴을 마주 보고 만나고 싶은 것들이 있다. -18쪽
마음먹은 것은 기어코 하시는 분이셨군요.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각각의 개인은 의식이란 것을, 심지어 자신의 의식도 확인해 볼 수 없다. 그렇다면 개인이 하나의 의식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30쪽
갑자기 제 의식을 주섬주섬 꺼내어 펼쳐보고 싶어 집니다. 몇 개인지 한 번 세어보고 싶거든요.
자기 자신을 여러 겹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54쪽
가르쳐 주세요. 저도 한 번 해 보고 싶어서요.
지나친 표현의 유일한 변명이 될 수 있는 것은 다양성이다. 모든 사람은 스무 권 이상의 책을 남겨서는 안 된다. 스무 명의 다른 사람이 쓴 것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 말이다. -127쪽
넘볼 수 없는 언행일치의 경지...
이 책을 읽는 재미있는 방식 두 가지를 추천한다. 하나는 방금 내가 한 것과 같이 페소아가 이명에 얼마나 집착했는지의 흔적을 좇으며 읽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에 관한 금언 같은 페소아의 말들을 건져 올려 곱씹으며 읽어나가는 방법이다. 조금 지루하게 느껴질 때는 앞의 방법을 병행하며 읽으면 페이지가 쉽게 넘어간다는 팁을 기꺼이 공유하겠다.
편지하겠노라고 약속한 뒤로 얼마나 나의 내밀하고 박애적인, 오래전부터 나를 관통해 온 정신적 위기의 본성을 지닌 '케이스'에 대해 말해주고 싶었는지 모른다네. 평소에 내가 말이 없는 편이긴 하지만, 이것만은 누군가에게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누군가는 다른 어떤 이도 아닌 바로 자네여야 한다네. 내가 아는 무수히 많은 이들 중에서 오직 자네만이, 나의 정신적인 실체성의 수준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지. -45쪽
위의 인용문은 -무척 그렇게 보임에도 불구하고- 지킬 박사가 쓴 편지가 아니다. 당연하게도 이 편지의 작성자는 페소아 본인이며, 수신인은 아마도 그의 지인이었으리라 생각되는 포르투갈 작가이다. 자신의 다른 인격을 고백하는 헨리 지킬의 고백처럼 읽히기도 하는 건, 이것 역시 페소아가 자신이 이명으로 글을 발표하겠다는 계획을 밝히는 편지글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을 갈래갈래 나누어 여러 작가를 탄생시킨 이 경이로운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조금이라도 생기셨다면, 축하드린다. 지금은 서점 어딜 가도 페소아에 관한 책을 여러 권 발견할 수 있는 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