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최애는 있다

곽재식 외, 크리에이터의 인생 만화

by 담화
누군가 열심히 만든 이야기를 혼자 소비하는 것도 물론 재미있지만, 그 이야기에 대해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가 더 재미있을 때가 많습니다. 분명 같은 이야기를 경험했는데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는 나와는 다른 다양한 생각들을 듣고 있노라면, 내가 인식하는 세계가 조금은 넓어지는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5쪽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0793025


그렇다. 바로 그거야... 맞습니다, 정말이지 옳으신 말씀.

포스타입 담당자님이 쓰신 서문은 구구절절 공감을 눌러주고 싶은(버튼이 없다...) 말들의 향연이다. '평소 내적 친밀감만 갖고 있던 크리에이터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콘텐츠를 신나서 소개하는 글은 어떨지 꼭 읽어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그의 고백이 곧 이 책의 기획의도라고 하겠다. 여기에 참여한 크리에이터들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소설가이자 교수인 곽재식(내가 곽재식 작가님을 처음 기억하게 된 계기가 좀 재미있다. 몇 년 전이었던가, 항상 챙겨 듣던 팟캐스트 <빨간 책방>에서 본인의 책 항상 앞부분만 쓰다가 그만두는 당신을 위한 어떻게든 글쓰기를 열렬히 홍보하는 광고 덕분에 그분의 성함을 완벽하게 기억하게 됐는데 무엇보다도 저 엄청난 제목을 단 한 번도 틀리지 않고(물론 녹음하면서 여러 차례 혀가 꼬이지 않았을까 대략 미루어 짐작만 해 본다) 우다다 쏟아내는 박력에 오... 하고 감탄했더랬다. 아무튼.

그림 그리고 유튜브도 하는 이연, 역시 유튜버 겸 철학자인 이충녕(감히 이 이름을 불러도 되나 흠칫했다면 저와 같은 생각을 하신 게 맞군요), 북튜버이자 철학도, 시인, 뮤지션, 더불어 놀라운 댄스 실력을 갖고 있는 김겨울, <며느라기>로 공전의 히트를 치신 작가 수신지, 그리고 제가 잘 모르는 김영대, 오세연 두 분과 최애작가 중 한 분인 김중혁 작가, 차은우와 본인의 유전자는 99.9% 일치한다는 말씀(유튜브를 찾아보시면 됨 ㅎㅎㅎ 과학적 팩트이긴 하지만 심리적 저항감은 어쩔 수가 없군요 물론 저는 관장님의 팬입니다만)으로 많은 이들을 웃게 하신 과학 커뮤니케이터 이정모. 총 아홉 분의 최애 만화가 소개된다.


목차에 등장하는 작품 목록을 보는 순간 내가 이 작품을 알고 있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은 작품도 더러 보였지만(작품의 퀄리티가 아니라, 제작년월일... 이기 때문이랄까... 아니랄까...), 대부분은 반가움과 공감과 탄식의 '아 맞아 그랬지'로 점철되는 독서의 시간이었다고 하겠다. 아니 그중에서 제일 웃었던 건 역시 <슈퍼트리오> 때문인데, 지금 내 나이 또래 중에서 소싯적에 만화 좀 봤지 하는 사람들 중에서 전설적인 황미나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본문에서 슬쩍 언급하고 지나가듯이 황미나 작가의 작품은 크게 굉장히 장대한 서사를 다루는 작품과 가볍고 코믹한 작품으로 분위기가 나뉘는데 후자의 작품군에는 무술 고수가 적지 않은 비율로 등장한다. 그건 황미나 작가가 쿵후를 수련하던 분이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90년대의 서브컬처를 이끌었던 대표적인 만화 잡지들 가운데, 어떤 건지는 안타깝게도 지금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다 봤단 소리다) 황미나 작가와 그분이 쿵후에 가진 관심과 애정을 간단하게나마 인터뷰한 기사가 실린 적이 있었다. 쿵후를 하는 만화가라니 대박 멋있다...라고 국기에 대한 맹세의 시간도 아닌데 가슴에 손을 얹고 진심으로 감동했더랬다. 뭐, 그런 적이 있었다.

슬램덩크는 또 말해 무엇하겠는가... 입만 아프지. 대학 농구의 전성시대 아니었던가. 물론 농구만 보러 다니지는 않았고 배구도 엄청나게 보러 다니긴 했지만 그럼에도 마음속 원탑은 항상 수겸이었다... 아니 이 얘기를 왜 하고 있지.

장르가 뭐건 간에 흔히 인생**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은 어떤 방식으로든 크게 상흔을 남긴 작품일 것이다. 고리타분한 교훈이어도 좋고 잊히지 않는 한 장면일 수도, 사라져 가는 빌런이 남긴 최후의 한마디일 수도 있고. 그런 인생작에 대해 가슴을 부여잡고 웅변할 수 있는 자리가 주어졌다는 건 굉장한 기회인 거지. 그러니 이 에세이를 보실 때에는, 과연 그 아홉 분 중 누가 가장 '감정적으로 설득되는' 작품 소개를 했는지에 방점을 두고 읽어 나가는 것도 흥미롭지 않을까 한다.


실컷 다른 작품 얘기를 했지만, 이 책에 실린 글들 중 가장 설득력 있었던 건 스누피 이야기를 쓴 김중혁 작가의 글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세상은 꿈꿀 수 없는 세상이고, 사랑이 너무 거대하여 글에 담을 수 없으면 사랑 자체를 포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스누피는 어떻게든 써보려고 노력한다. 글이 안 써질 때면 위대한 소설을 흉내 낼 때도 많다. -292쪽
나는 할 말이 많고 쓰고 싶은 글도 많은데 시작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는 세상을 원망했다. 스누피가 받은 수많은 거절 편지 중에서 나를 울게 만든 것도 있다.

귀하의 단편소설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유감스럽게도 현재 우리의 필요와는 맞지 않는 작품입니다. 혹시라도 그렇게 된다면 우리로서는 큰일이겠지요. -295쪽
그는 매일 오전 두세 시간 동안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점심을 먹고 나서 서너 시간 동안 만화를 그렸다. 생각이 막히면 창밖을 뚫어져라 바라봤고, 상상력을 끄집어내기 위해 노트에 낙서를 했다. (...) 50년 동안 단 한 번도 배경 작업을 위한 어시스트를 고용하지 않았다. 그러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아널드 파머가 다른 사람을 시켜 칩 샷을 치는 것과 뭐가 다른가?" -315쪽
틈날 때마다 1만 7897편의 만화를 다시 볼 것이다. 스누피의 소설처럼 마무리를 해야겠다. 나의 피너츠 친구들에게. 너희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전하고 싶어. 너희들을 다시 만날 때까지 계속 그리워할 거야. 그게 언제이든 간에. -325쪽


김중혁 작가는 방대하기 짝이 없는 스누피의 등장인물들 중에서도 스누피와 스누피의 형인 스파이크에게 깊이 감정이입하여 글을 썼다. 너무 길어서 엄두조차 안 나는 그 대작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좀 읽어봐야겠는데,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든다.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넘쳐서 풍덩 잠겨버린 텍스트를 읽고 있노라면, 이분이 괜히 소설가가 아니다... 싶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쓰고 보니 어쩐지 기승전김중혁찬양이 되었다. 아, 상관없다. 이건 돈 벌려고 쓰는 글이 아닌 것이다! 씐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SF라는 멋진 신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