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리 페이지, 이야기를 지키는 여자
그녀를 고용한 많은 사람이 그녀의 삶에 특별한 무언가를 가져다 준다. 재니스는 자신도 그들의 삶에 작게나마 기여하는 바가 있기를 바란다. 아래 칸부터 먼지를 떨어나가던 그녀는 서가 중간에서 동작을 멈춘다. 사실 그녀는 확신이 없고 불안하다. 이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다. 만약 그녀가 그 이야기에서 맡은 역할이 있다면 엑스트라에 가까운 아주 작은 역할일 것이다.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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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니스는 청소 도우미다. 그녀가 이 일을 시작한 건 불가항력적이었다. 한 직장을 진득하게 다닐 인내심도 의지도 없는 남편은 툭하면 직장을 옮겨 다니고 귀를 팔랑거리며 이 사업 저 사업을 전전하며 재니스가 필사적으로 모아놓은 돈을 까먹기 일쑤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를 쉽게 떨쳐내지 못한다. 엄마가 그토록 휘둘리는 걸 보다 못한 아들이 감정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럼에도 불행 중 다행으로 청소 도우미 일을 하며 그녀는 삶의 낙 한 가지를 얻는다. 재니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기 시작한다. 물론 아무 이야기나 수집하지는 않는다. 그녀의 이야기 수집에도 나름의 철칙이 있어서, 한 사람당 하나의 이야기만 수집할 수 있고 그건 어떤 식으로든 영감을 주는 이야기여야 한다. 예를 들면,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일터 중 하나인 성악가인 조디의 경우처럼.
재니스는 조디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인간이 가진 불굴의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재능을 발휘하라는 메시지도 담겨 있지만 그 주제는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다. 어릴 때 읽었던 성경 속 이야기들과 너무 비슷한 데다 자신에게는 재능이 없다는 생각으로 자꾸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생각은 밀쳐내고 장차 조디 보먼이 된 소년이 보여준 불굴의 의지에만 집중한다. -15쪽
실제로 알고 지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어도 재니스는 우연히 엿듣게 된 사람들의 대화에서도 무언가를 느꼈을 때 기꺼이 그 이야기를 수집한다. 이야기의 빈틈은 스스로의 상상력으로 메우기도 한다. 타인의 이야기를 훔쳐 듣는다는 윤리적인 차원의 판단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재니스가 그 이야기들로 '소설을 쓰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그녀는 그저 내면의 도서관에 그 이야기들을 꽂아 넣기만 할 뿐이다. 자신에게 그 이야기가 주는 용기, 위로, 희망, 해방감, 자기 위로, 공감... 그 밖의 수많은 좋은 것들이 필요한 순간에 꺼내어 보기 위해서.
"세상에 이야기가 없는 사람은 없다"는 새로운 고용주의 말에 재니스는 이렇게 생각한다.
자신이 이야기 수집가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주장하고 싶다. 자신은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모은다고. 그렇게 큰 소리로 외쳐서 내면의 작은 목소리를 잠재우고 싶다. -76쪽
들었든 읽었든 내게 온 이야기는 모두 잔상을 남긴다. 평생토록 그림자처럼 드리워지는 이야기도 있고, 순간 강렬하게 박혀드는 인상 같은 이야기도 있다. 이야기가 거쳐간 사람은 매 순간 변한다. 늘 변화의 가능성에 자신을 열어 둔다. 재니스는 자신이 모은 이야기들을 돌아보며 거듭 생각한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정말로 '이야기를 갖는 것'일까. 어쩌면 단 한 번뿐인 '완벽한 순간'을 찾는 것은 아닐까(128쪽). 훗날 되돌아보며 자랑스럽게 여길 만한 일을 하나쯤 해내는 것이어야 하는 건 아닐까(205쪽).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어떤 것이 정답이라고.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재니스가 타인의 이야기에 몰두하는 만큼 자신의 이야기는 꽁꽁 닫아두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자신에게는 이야기가 없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재니스가 고용주이자 친한 친구가 되는 B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마침내 자신을 여는 순간은, 그래서 해방의 순간처럼 읽힌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로 자신을 위로하던 사람이 마침내 오랜 시간 자신을 옭아매던 이야기를 풀어주었기 때문에. 그 이야기와 함께 가두어두었던 자신을 세상을 해방하고 위로받았기 때문에.
이미 소설을 통해 답이 나왔지만서도, 다시 한번 묻게 된다. 이야기가 없는 사람은 정말 없을까. 이것은 소설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자박자박 걸어 다니는 질문이다. 사람마다 다른 답을 내어놓을 수 있지만 내 답은 이것이다. '어떤' 이야기인지 모를 수는 있지만, 이야기가 '없는' 사람은 없다고.
정말로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스스로 자신의 삶을 한 줄의 로그라인으로 축약할 수 있다면 그건 꽤 근사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가 ***하는 이야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