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소연, 영원에 빚을 져서
빚을 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빚은 곧 채무다. 특정한 사람(채권자)에 대해, 일정한 행위를 해야 할 법적 의무. 간단하게 말해 빌린(받은)만큼 갚아야 하는 그 무엇이다. 그러면 약간 말을 부드럽게 바꾸어, 내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갚아야 할 온당한 도덕적 책임도 채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화자인 동이와 석이, 혜란은 대학 재학 중 해외 봉사 프로그램을 통해 친해진 사이다. 4개월간 캄보디아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던 중 그들은 한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전대미문의 참사 -세월호 사건- 로 인해 그들이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를 절감한다.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그 일을 받아들이는 방식, 소화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고 그건 각각의 개인이 현재 어떤 마음의 부침을 겪고 있는지와도 결코 소원할 수 없다. 세 사림이 지나고 있던 생의 계절은 각자가 부둥켜안고 있는 풀리지 않는 고민이 가장 크게 삶을 잠식하는 시기인 까닭에, 熟은 그들에게서 가장 먼 개념일 수밖에 없다. 참사 앞에서 생겨난 관계의 균열 때문에 귀국한 이후 그들의 관계는 예전과 같지 않다. 9년이 지난 후의 어느 날, 그들에게 석이의 실종 소식이 전해진다. 어째서인지 혜란과 동이는 석이를 찾으러 직접 떠나야만 하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때 당시 우리는 서로에게 미묘한 변화가 있다고만 생각했지,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한 변화는 인지하지 못했다. 그 시절 우리는 스스로가 겪고 있는 문제점을 잘 인식하지 못했고, 해결하려 들지 않았다. 그때그때 각자 시간을 보내는 방식으로 매일을 버틸 뿐이었다. -34쪽
그리하여 그들은 각자 애써 생존한다. 뉴스에 오르는 '생존자'는 아니었어도, 당시의 우리 모두는 직간접적으로 이 무능한 비극에 가담하고 있었기에 각자 필사적으로 생존하기 위해 애썼다. 그 방식의 윤리성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그 과정에서 각자의 트라우마를 이겨내야 했으므로 원치 않게 조금씩 타인을 해쳤다. 그들도 다르지 않아서, 본국의 사고 소식에 '캄보디아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삐썻의 말에 이렇게 생각한다.
맞아, 그거랑 이거는 다르지. 우리조차 쉽사리 말할 수 없는 사건을 캄보디아 사람이, 하필 그런 식으로 부려놓는 것이 못마땅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렇게 테이블 위에는 침묵이 이어졌고 먼저 삐썻이 침묵을 깼다.
"벙도 그렇게 죽을 수 있어요."
그러더니 한참 말을 어...... 음...... 고르다 약간 지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미안해요. 그런데, 어떤 죽음은 그런 식이기도 해요. 다를 게 없어요." -59쪽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비극에 대해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계속해서 말하려 한다. 말해야 하는 이유를 논거를 들어 설득하려 한다. 계속, 그런 일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또 다른 비극이 벌어진다. 캄보디아에서 발생한 사고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거랑 이거는 달라'라고 말했던 석이는 다른 사람이 되어, '그것과 이것이 무엇이 다른가'를 넘어서,
어떤 사람은 죽어나가고, 어떤 사람은 죽어나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애를 쓰는데, 나는 꾸벅꾸벅 졸면서 내 머리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몰랐어. 그날 내가 이태원에 갔으면 어떤 일을 겪었을까. 나는 신촌에 있었어. 이태원이 아니라. 그건 정말이지, 놀랍도록 가혹한 일이야. 시시껄렁한 영어회화 모임에 갔고, 으레 그랬듯 핼러윈 파티를 즐겼어. -63쪽
라고 말하며 끊임없이 고통스러워한다. 그건 석이가 고통을 다루는 속도와 방식이다. 당시 개인적인 상실의 슬픔에 매몰되어 있었던 동이에게는 따라가기 벅찼을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감당하기에 가쁜 현실에 짓눌릴 때 손쉽게 타인을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 그건 종종, 정말로 나에게 나쁜 짓을 한 사람보다, 내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에게 우리가 흔히 하는 일이다. 그리고 '내가 정말로 무슨 짓을 한 것인지'는, 세월이 훌쩍 흘러 내가 비로소 객관적으로 그 일을 돌이켜 본 순간에나 깨닫곤 한다. 동이처럼.
결국 나와 혜란의 문제는, 어떤 식으로든 석이의 마음과 고통을 함부로 가늠하려고 했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이해하는 것과 가늠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20대를 훌쩍 지나 30대가 되어버린 석이가 이전과 어떻게 다른 마음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결정을 내렸을지 이해하려 애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65쪽
영원이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보편 진리와도 같은 개념일지도 모른다. 살아가며 뒤늦게 찾아오는 깨달음과 묵직한 후회. 아무 생각 없이 내뱉었던 한 마디의 말이 빚처럼 남아 남은 생의 틈틈이 몸을 불려 상환을 요구하며 찾아오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다.
나의 상실이 무거운 만큼 타인의 상실도 그만큼 슬프고 아프다. 나의 상실이 곧 그의 상실이다.
대신 석이와 비슷한 다른 걸 찾았는데, 무엇을 찾았는지 정확히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나 석이에게, 정말이지 큰 빚을 졌던 것 같아." -126쪽
나도 빚을 졌다. 우리 모두가 그렇다. 그냥,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살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