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애터버리, 판타지는 어떻게 현실을 바꾸는가
'판타지'라는 장르를 이야기할 때, 우리의 마음에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마 대강 이런 것들일 테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각자의 규칙과 원리로 움직이는 세계와 그곳에 쌓인 역사. 신비로운 힘을 지닌 생물들과 그들에게 얽힌 전설과 신화. 곧잘 장대한 서사로 이어지곤 하는 인물들의 여정 또는 거대한 갈등과 대립.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현실 도피적인 장르라고도 말하지만, 옹호론자들은 현실을 해석하고 어떤 세계의 구조를 드러내는 장치로서 기능한다고도 한다. 둘 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후자 쪽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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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판타지가 세 가지 차원에서 진실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로, 사람들이 세계와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의지한 전통적 신념과 내러티브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27쪽) 전통적인 신화와 우리의 관계를 재창조하는 수단과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둘째.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대상과 미지의 대상 사이의 거리를 좁혀주는 수단으로써의 메타포가 어떤 경험의 영역을 이용해 또 다른 경험을 헤아리는 것처럼(29쪽), 유사성이 자리하지 않은 두 경험 사이의 간격을 좁혀 그 사이에 어떤 의미를 심는다. 종종 그 결과로 우리는 어떤 깨달음과 충격을 받기도 한다.
셋째. 판타지는 세계의 형태, 특히 변화의 형태를 반영한다(34쪽). 종종 그 변화는 공간의 변형과 더불어 시간의 변화와 함께 나타나곤 하는데, 이는 성장과 욕망 같은 개인 내면의 변화가 구조화되는 과정을 묘사한다(38쪽).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판타지가 어떤 방식으로 서사를 구성하는지, 그리고 이 장르가 어떻게 인간 경험과 사회에 대한 진실을 탐구하는 수단으로 작동하는지에 대해 여러 사례를 들어 해설하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책들 대다수가 번역되지 않았다는 점은 아쉽지만, 예시를 풍부하게 들어 이해를 도왔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겠다. 판타지 장르의 역사를 개괄해 두었다는 것 역시 간과할 수 없을 것 같고. 이 장르가 독자의 현실과 어떤 방식으로 의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지 여러 관점에서 고찰하고 있음도 마찬가지로 주목할 만한 점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약간의 아쉬운 점이라면, 입문서로서는 약간의 진입장벽이 느껴지는 두께와 전문가적 밀도... 랄까... 아주 친절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엄청나게 깊이 들어간 것도 아니고, 아주 딱 애매한 정도. 하지만 이런 책을 굳이 찾아 읽을 정도로 판타지 장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장르 초심자라고까지 할 수는 없을 테니, 이 정도가 딱 적절했을지도 모르겠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현재 이 장르의 전문적인 연구자들이 천착하고 있는 토픽이기도 하고, 한창 토론에 불이 붙은 이슈이기도 하다. 달리 말해 판타지 장르의 최전선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대부분의 논제들이다. 장르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엄연히 소비자와 시장이 형성돼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어서, 간혹 존재의 당위 여부를 논하는 평론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는 말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 않은가. 이를테면 해당 장르가 반영하고 있는 문화적 맥락과 의미가 무엇인지, 사회적인 영향력의 크기는 얼마나 되는지. 또는 어떤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등등. 재미있으면 그만이지 뭐가 대수일까 싶긴 해도, 이런 주장을 만나게 되면 재미있으면 장땡이 아닐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가상 세계는 그 세계의 거주자들이 현실 세계를 개조가 가능한 상상의 구조물로 바라보게끔 부추긴다."
이거의 아이들은 디킨스의 런던과 와일더의 플럼 시냇가를 게임 디자이너들이 샌드박스라고 부르는 개념으로 변화시킨다. 이는 모두에게 공유되는 개방형 환경이자 게임 스토리에서 참가자가 따라야 하는 내러티브의 제약을 최소화한 환경을 말한다. -92쪽
엔라이트는 소망을 소설에 필요한 편집 지침으로 여겼다. 작품 속 캐릭터에게는 "어수선하고 늘어지는 모든 일상적인 일과 온갖 따분한 일, 하품, 기침, 정신없는 수다"가 허용되지 않기에 편집을 더해 이들의 모험을 다음과 같이 만든다.
[더욱 깔끔하고 공정하며 흥미롭게 만드는 것이다. 모든 일이 결국에는 잘 해결되고, 스토리는 삶과 달리 정점에서 결말을 맞이한다. 이들이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다니고, 결혼을 하고, 주택 담보 대출을 상환하고, 자녀를 키우고, 돈걱정을 하고, 치과에 다니고, 늙어가고, 죽음을 맞이하는 등의 일을 함께 헤쳐나갈 필요가 없다. 영원한 행복을 지켜주는 것이 우리의 특권이다.] -108쪽
요즘은 그야말로 판타지의 전성시대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곳곳에 환상문학이 넘쳐난다. 장르문학의 울타리 안에서, 장르와 스낵컬처의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서, 완벽한 유희의 땅 안에서. 재미있는 건, 그 장르의 장르의 장르로 세분화할수록 하위에 속하는 장르의 문법이 견고하고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정형화된 틀이 존재한다는 사실. 거대한 세계관 안에서 약동하는 상상력의 세계가 있고, 백일몽이나 다름없는 작고 귀여운 몽상의 세계가 있다.
저마다의 세계관 버블이 보글보글 피어오르는 세계의 결과 겹을 관망하고 있다 보면 얼마나 재미있는지 시간 가는 줄을 모를 정도다. 개인적으로 참 존경하는 어떤 작가님도, 누구나 자신만의 이야기를 쓸 수 있으면 좋겠다, 써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는데 정말 그렇다. 진심으로 동의한다.
뱀발.
본문에서 아마도 모던 또는 포스트모던 판타지라고 분류했을 법한 하위장르를 현대판타지라고 번역해 두셨던데, 다 아시겠지만 국내에서 현대판타지라고 부르는 장르와 책에서 언급하는 현대판타지는 절대로 같은 장르가 아니다. 개정판이 나온다면 차라리 원문의 용어를 그대로 기재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