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언제나 그곳에

이유운, 사랑과 탄생

by 담화

가끔은 현타가 온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읽고 쓰기를 거듭하고 있을까. 그냥 그것이 생활의 습이 되어버려서 그렇다, 는 몹시도 게으른 답이지만 딱히 그것 말고는 떠오르는 다른 답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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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가끔씩 '탕진잼'을 누리기에 꽤 적절한 상품이 아닌가 싶다. 부동산적 부담감을 생각하면 전자책도 나쁜 대안이 아니겠지마는, 역시 책이란 두둑하게 쌓아놓고 넘겨가며 읽는 게 제맛인 법. 나름 책 고르는 안목은 제법 있다고 자신하는데(수천만 원 갖다 부었는데도 없으면 그게 이상한 거지) 그럼에도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지듯 간혹 실패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허공을 쳐다보면서 잠시 반성한다. 자만하였구나. 태만하였도다. 대충 뭐 그렇게. 그런데 그걸 인정하기 싫을 때는 가끔 억지를 부린다. 세상에는 반면교사라는 게 있다고.


소규모 출판사 중에서 가끔 보석 같은 출판사를 발견하곤 하는데, 어쩌다 그런 횡재를 하면 덮어놓고 그 출판사를 믿게 된다. 물론 그런 곳 중에서 후에 뒤통수를 후려갈긴 데가 없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그 또한 유난히 자본주의의 엄혹한 논리를 견디기 힘들어서가 아니겠느냐고 이해하려 한다. 아직까지는 얻어맞은 적 없고, 어쩐지 얻어맞을 일도 없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가는 출판사 중 한 곳이 1984BOOKS다. 누군지도 모르겠는 저자의 책인데도, 여기에서 나왔으니 나올 만한 이유가 있겠거니 하면서 손을 뻗게 되는 magic.


이 책도 그렇게 만났다. 이유운이라는 이름도 처음 봤다. 책날개를 살펴보곤 오 시인이시구나- 알게 됐다. 시인의 산문집에서만 읽히는 독특한 결이 있는데,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처음 이제니 시인의 글에서 특이하다고 느꼈던 그 살얼음 같은 아주 얇고 투명한 층. 있긴 있는데 없는 것. 숨에 바짝 닿아오는 서늘한 감각이 분명히 느껴지는데 잘못 손대면 깨어지고 바스러져서 언제 그런 게 있었느냐는 듯 사라져 버릴 얇디얇은 막 같기도 한 것. 그것이 시인들의 산문에서 유독 잘 느껴진다는 사실에 굉장히 신기해한 적이 있었는데, 이 책에서도 여지없이 그것이 느껴져서 이것은 시인 종특인가... 잠시 고민해 보기도 했더랬다.


나를 에워싸고 있는 영사기 사이에서, 움직이는 이미지는 오직 나였다. 나만이 움직였다. 그리고 움직이는 나를 바라보는 어른들, 그들의 시선이 나를 따라 작동했다. 나와 타인의 세계 사이에 사랑의 시선이 있었고, 그 시선이 마주치거나 엇갈릴 때 그 흔적을 따라 궤도가 탄생했다. 그리고 궤도가 천천히 일직선으로 맞춰졌을 때, 나는 그 사건들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10쪽
나는 집을 지었다. 거리에서 옷을 벗고 살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러나 그 거리로 뛰쳐나갈 때를 대비해서 큰 창문을 만들었다. 나는 그 집에 갇혀 자랐다. 나는 어른이 되었으나 내가 만든 집에서 다시 자랄 필요가 있었다. 나는 길거리에서 배운 이름들과 문장들을 모조리 다시 옮겨 적어야 했다. 벽에. 내가 만든 집의 벽에. 그 집에 누가 들어올지는 모르니까. 그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말로 그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나는 수많은 사랑의 언어를 학습하고 그를 위해 열릴 준비를 해야 했다. -59쪽
가본 적 없는 곳을 그리워하는 것은 가능한가?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리움이라는 것은 감각적으로 경험한 사실에 대한 인식적ㆍ감각적 회귀 본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각적으로 경험하지 않은 장소에 대해서 회귀하고자 하는 욕망은 논리적으로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들은 대부분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140쪽


사랑이란 대체 무엇일까, 이 거대한 명제, 가정, 내지는 철학적 주제가 될 수도 있을 질문 앞에서 각자의 대답을 요구한다면 퍽 재미있을 테다. 어쩌면 서사적 성찰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작가는 질문에 대해 집착적이기까지 한 탐구 의식을 보여 준다. 그가 만들어낸 적 없으나 벗한 적 있는, 활자 속의 비존재들의 방식을 통해.


아무리 사랑하는 존재라 해도 그의 온 존재를 모두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반면에 어느 누구에게서라도 하나쯤은 이해하고 사랑하고 보듬어주고픈 구석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던가. 그러니까, 그게 시작점이다. 거기서부터 시작한 것이다. 세상에는 이토록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랑의 모습이, 단상이, 그림자가 현존하고 있음을 본다. 매 순간 사랑이 태어나고 숨 쉬는 모습을 발견한다. 사랑은 영원을 노래하지만, 실상은 짧은 순간과 찰나에 존재할 때가 더 많다는 사실을 새삼 체감하며 책장을 덮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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