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적격이고 부적격인가

연여름, 부적격자의 차트

by 담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냥, 이대로 이렇게 살아도 좋은가?


주어진 방식에 순응해서 살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 없이 생존할 수 있는 세계의 구성원으로, 사용기한이 다 닳은 시점이 되면 교체당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시스템 아래에서 살아도 정말 괜찮은 걸까?


이 이야기는 이런 질문에서 시작한다. 인간은 생존의 조건만 채워지면 충분히 살 수 있는 존재가 맞는 걸까, 하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사고실험.


22세기말, 거듭된 유전자 실험과 편집의 결과로 강아지와 망아지의 사랑스러운 모습만을 뽑아 섞어놓은 것 같은 외관의 반려동물종이 탄생한다. 이 종의 이름은 리누트로, 사람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게 되는데 비단 그 사랑스러운 외양 때문만이 아니라, 생애주기가 인간과 거의 유사한 까닭에 인간의 한평생을 함께할 수 있다는 특이한 장점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장점은 얼마 가지 않아 새로운 재앙으로 재탄생한다. 신 3차 대전이 종결된 이후, 주인과 거주지를 잃어 야생화된 리누트가 치사율 100%의 바이러스의 근원지가 되었기 때문이다(굉장히 뼈 있는 설정이다).


생존 외의 어떤 삶의 목적도 생각할 수 없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마침내 최후의 생존자들이 동반자살을 논의하기 시작했을 때 상상도 못 한 구원자가 나타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지난 세기의 역사와 변화와 현재의 열악한 상황을 비롯하여 생존자들의 다툼과 논의까지 모두 학습한 인공지능이.


배아 연구에만 동원된 폐쇄형 인공지능이었기 때문에 전후의 '인공지능 소거' 대상이 아니었다고 자신을 밝힌 인공지능 모세 Moses는 생존자들이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나 한다.


"다수의 사용자가 생존을 지속하기 위한 최적화 시스템의 설계입니다. 설계를 요청하시겠습니까?" -27쪽


모세는 생존자들의 대화를 학습한 결과로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을 덧붙인다. 일부는 그렇게라도 생존하고 싶어 하고, 일부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논쟁하는 것을 모두 데이터로서 흡수했기 때문에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는 지적을.


"사용자 여러분은 생존과 죽음 양쪽 모두를 동시에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장 먼저 소거해야 할 모순으로 판단됩니다." -34쪽


그리하여 선도, 악도 아닌 모세는 이 중재도시의 균형과 지속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양측 모두가 수용가능한 적절한 생애주기 40년과 균형제라는 통제시스템을 활용한다. 생애주기에 도달한 인간은 전담병동으로 옮겨져 소거(일종의 존엄사일까...)되고, 다음 세대의 인간들이 그들의 시스템 롤을 이어받는다. 심지어 그들을 부르는 명칭은 '실무자'이며, 인공지능 모세는 '중재자'이다. 모순을 일으키는 것은 인간의 욕망과 감정인 까닭에 도시의 공동체는 균형제라는 약물을 투여함으로써 사적 감정을 철저하게 통제한다. 감정은 오류의 주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견 평온하고 규칙적인 그들의 삶은 기억을 상실한 한 실무자가 기존의 규칙을 마음대로 훼손하기 시작하면서 크게 흔들린다. 꿈과 허구가 철저하게 차단되는 중재도시에서 허구를 말하기 시작하는 실무자 레드는 부적격자로 간주되어 결국 소거당하고, 안 그런 듯했어도 레드와의 대화를 통해 동요하기 시작했던 실무자 세인은 지금까지의 자신을 부정하게 될지도 모를 어떤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그 등을 보며 이폴은 몇 세대 전 죽은 단어 하나를 떠올려 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죽음으로 인해 곁에 없는 누군가를 계속 기억한다는 의미를 가진 말. 사라진 것들이 즉시 보완되고 대체되는 중재도시에서는 존재할 이유가 없는 단어를. -140쪽


어떤 사회에 적합하고 적합하지 않음을 누가 결정할 수 있을까. 결정되어 있다 한들 우리는 굳이 기다리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 시스템의 낙오자와 부적격자는 반드시 나올 것이라는 걸. 한편으로는 이미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상기한다. 나 역시 어떤 차원에서 이미 부적격자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전한 궤도에서 자진탈락했을지언정 스스로의 기록을 만들어나가고 있다고. 경로이탈자만이 볼 수 있는 풍경이 있음을 조용히 속삭여주고 가는 이 소설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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