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마텔, 파이 이야기
굿데이, 미스터 원주율.
이름을 파격적으로 바꾸거나 줄여야 할 필요성을 느낀 적, 저도 있기 때문에 본명인 '피신 몰리토 파텔'을 '파이'로 줄여버린 당신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아주 오래전 얘긴데, '센양'이라는 이름을 가진 중국인 동급생이 있었어요. 그 친구를 알고 지낸 지 한 3개월쯤 됐을 때던가, 갑자기 학교에서 선생님을 포함해서 모든 아이들이 그 아이를 '씨앤'으로 부르기 시작해서 대체 무슨 일인가 궁금해했더니 그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그냥 내가 포기했어.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피신'을 '파이'로 줄여버린 당신의 마음도 그 비슷한 것일 테죠.
새로운 시작.
새 선생님이 들어올 때마다 똑같은 일을 반복했다. 동물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반복은 중요하다. 보통 이름을 가진 애들이 이름을 말하는 중간에 난 종종걸음으로 앞에 나가 다시 태어남을 밝혔다. 칠판 긁는 소리를 낼 때도 있었다. 몇 번 반복한 다음에는 반 아이들이 함께 입을 맞추었다. 점점 소리가 커지다가 잠시 숨을 들이쉬면, 나는 적당한 곡조로 새 이름을 '노래'했다. 합창단 지휘자였다면 얼마나 기분이 좋았을까. 내가 최대한 빨리 숫자를 쓸 때 몇 아이는 다급한 소리로 "삼! 점! 일! 사!"라고 속삭였다. -38쪽
한 사람의 삶을 가장 오랫동안 지배하면서, 그 삶의 주인에게 아무런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는 것 중 하나가 이름이 아닐까 싶어요. 그러니까 스스로를 다시 명명하는 건 비록 '껍데기'일지라도 자기 정체성에 대한 주체적 선언이라고 할 수 있죠. 종종 모멸적인 놀림을 당해왔던 이름을 가진 소년 피신-pissing, 소변을 본다는 의미가 있는-이 '이름 짓기 유행'을 선도한 아이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요. 저는 이 대목이, 어찌 보면 별 볼 일 없는 서설 같기도 하지만 사실 이 이야기에서 아주 중요한 전조라고 생각했어요. 피신에서 파이가 된 것처럼, 파이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소년에서 광활한 태평양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조난자로 거듭나게 되니까요.
그런 복선은 군데군데서 발견돼요. 이를테면 당신의 아버지가 호랑이가 얼마나 위험한 생물인지 본을 보여주기 위해 살아있는 염소를 장기간 굶긴 호랑이 우리에 집어넣어 눈앞에서 찢어발겨 잡아먹는 현장을 어린 당신에게 보여준 것 같은 거요. 그건 곧 당신이 그 염소와 다름없는 상황에 놓이게 될 거라는 암시나 다름없죠.
복선, 이른바 떡밥 뿌리기는 작가들이 퍽 좋아하는 작업이긴 하지만 유난히 당신의 이야기에선 그런 재미난 복선이 많이 발견돼요. 온갖 종교에 포용적인 어린이였던 파이 파텔은 교회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이슬람 사원에 다니며, 힌두교를 믿죠. 그러니 후에 배가 침몰한 뒤 조그만 배에서 벵골 호랑이와, 얼룩말과, 하이에나와 또 누구더라. 침팬지였나 오랑우탄이었나. 도무지 공통점이라고는 없는(동물이라는 공통점이 있군요) 존재들과 서로를 견제하며 숨을 죽이고 있는 순간에 이르러도 전혀 어색하지 않더라고요. 그게 다름 아닌 파이 파텔이니까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지는 거죠.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아무것도 못 얻을 거라는 불안감이 야금야금 파고들어서. 일 년 걸려 쌓은 것이 남의 손에 하루 만에 무너지리라는 불안감 때문에. 장래가 꽉 막힌 것 같아서. 본인은 괜찮지만 자녀들은 그렇게 살면 안 되겠기에.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느낌 때문에. 행복과 번영을 다른 곳에서만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107쪽
그래서 당신의 부모님은 인도를 떠나 캐나다로 이주할 마음을 먹습니다. 운영하던 동물원의 동물들을 데리고. 맙소사. 이민에 관한 온갖 이야기를 읽고 봤지만 정말이지 감탄(more like 대경실색)이 나오는 스케일의 이주 계획이었어요. 굳이 '기분이 어땠을지 상상해 보길'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 황망함에 하관을 틀어쥐고 탄식하게 된다고요.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들이 늘 그러하듯, 당신도 거대한 비극이랄지 난관에 부딪치게 됩니다. 별 수 없어요. 소설 속 주인공이 된 팔자를 탓하세요. 그렇다곤 해도, 저라면 차라리 거대 여객선과 함께 침몰하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전 원래 그래요. 좀비 아포칼립스가 닥치면 그냥 제일 먼저 좀비한테 뜯길 거예요. 끝까지 살아남겠다는 고귀한 인간의 의지는 높이 사고 존경하지만 제가 그러진 않을 거예요. 못해요. 싫어요. 아무튼.
나는 구명보트를 바라봤다. 그것도 호두껍질 반쪽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벼랑에 매달린 사람처럼, 수면에 매달린 꼴이었다. 중력 때문에 밑으로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같이 난파당한 동지가 눈에 들어왔다. 리처드 파커는 배 가장자리에 서서 내 쪽을 바라보고 있다. 어떤 순간이든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면 화들짝 놀라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 놀라울 때가 있을까. -202쪽
그리고 이내 당신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공포심에 대해 한마디 해야겠다. 공포심만이 생명을 패배시킬 수 있다. -203쪽
적극 동의합니다. 그런데요, 인생은 늘 의외의 순간에 의외 그 이상의 무엇을 가져오곤 합니다. 그 순간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때는 미묘한 종류의 경이감이 따라와요.
나를 진정시킨 것은 바로 리처드 파커였다. 이 이야기의 아이러니가 바로 그 대목이다.
무서워 죽을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이 내게 평온함과 목적의식과 심지어 온전함까지 안겨주다니.
(...)
여러분에게 비밀을 털어놓겠다. 마음 한편으로 리처드 파커가 있어 다행스러웠다. 마음 한편에서는 리처드 파커가 죽는 걸 바라지 않았다. 그가 죽으면 절망을 껴안은 채 나 혼자 남겨질 테니까. 절망은 호랑이보다 훨씬 무서운 것이 아닌가.
내가 아직도 살 의지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리처드 파커 덕분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가족과 비극적인 처지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나를 계속 살아 있게 해 주었다. 그런 그가 밉지만 동시에 고마웠다. 지금도 고맙다. 이것은 분명한 진실이다. -207쪽
이 감정을 알아요. 일종의 애증처럼도 보이는 이런 양가감정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나쯤 안고 살아가죠. 하지만 입 밖으로 솔직하게 꺼내어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진솔하게 내면의 고백을 꺼내놓는 순간, '나도 그런 적 있어'하고 맞장구치며 고백하지는 않더라도, 되새겨 보기는 할 겁니다. 그런 게 바로 좋은 이야기가 가진 가치가 아닐까요.
나는 227일간 버텼다. 내 시련은 7개월 넘게 지속되었다.
바쁘게 지냈다. 그게 생존의 열쇠였다.
구명보트에서, 또 뗏목에서, 언제나 할 일이 있었다. -237쪽
혹은 이토록 실천적인 삶의 지혜도 함께요. 한 번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저앉고 싶은 순간이 없었던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살아남고자 한다면, 살고 싶어 한다면, 방법은 있다고. 혹자는 태평양에서 호랑이와 표류한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대체 뭐가 도움이 되냐고 비아냥댈지도 모르지만 그럴 땐 이렇게 말해주면 돼요. 소설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요,라고. (폭소)
멋진 해피엔딩 고마워요, 파이. 어쩌면 스스로를 파이 π로 명명한 순간 당신의 운명이 달라진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너무 나간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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