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에 잠식당하면

대프니 듀 모리에, 지금 쳐다보지 마

by 담화

안녕하세요, 존.


...... 과연 안녕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뭐 그렇잖아요, 호러 소설의 주인공에게 안녕하냐고 묻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기괴한 것인지 곰곰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제 보니 인사 자체가 좀 스포일러 같기도 하고. 하지만 이 이야기가 나온 지는 무려 50년도 더 됐으니, 이 정도는 실수로...


호러물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아니요,라고 대답할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또 호러물을 제법 봤어요. 도대체 인간의 공포감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이런 게 궁금해서 관련된 책까지 기꺼이 찾아볼 정도로 공포라는 감정 자체에 가진 호기심은 좀 큰 편이거든요. 그리고 공포라는 정서에 관심을 갖다 보면 결코 넘길 수 없는 이름이 하나 있죠. 바로 당신의 창조주이기도 한 대프니 듀 모리에라는 무시무시한 네임드 작가입니다. 듀 모리에라는 이름은 몰라도, 「새」나 「레베카」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거든요.


아무튼요. 그중에서도 왜 굳이 당신을 골라냈냐면 그래도 알 것 같은 사람이어서 그랬어요. 속내를 알 것 같다고 해야 하나. 휴가를 떠난 베네치아의 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당신이 아내 뒤편으로 앉은 쌍둥이 손님을 보며 시답잖은 농지거리를 하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저들은 분명히 모종의 범죄를 저지르고 변장 중일 거라는 장난에 당신의 아내 로라는 에이, 그게 아니고 사실은 이런 거 아닐까 하고 그들에게 사연을 지어 붙이는 우스꽝스러운 장난을 받아줍니다. 그때 당신이 느낀 안도감이 이상하리만치 커서, 계속 읽어나가고는 있지만 어쩐지 불안해집니다. 아아, 역시 사연이 있었군요.


그는 생각했다. 잠시라도 쉴 수 있다니 고맙기도 하지. 로라는 멍청한, 하지만 아무 해 될 것 없는 놀이를 시작했어. 꼭 필요했던 치유의 기회가, 아이가 죽은 후 헤어 나오지 못했던 절망감을 잠깐 동안이라도 잊을 수 있는 기회가 드디어 찾아온 거야. -11쪽


아, 이제야 이해했습니다. 그렇죠. 도저히 형언할 수 없을 그런 거대한 상실감 앞에서 아무런 의욕을 내지 못하던 아내가 멀리 떠나온 휴가지에서 실없는 장난을 받아주기 시작했으니 얼마나 안심이 되었을지 이해가 가요. 저라도 그럴 것 같습니다. 거기서 약간의 장난기가 더해진 로라가 쌍둥이 노인들 중 한 사람이 화장실에 가는 것을 보고 '그들이 무엇을 하고 오는지 알아오겠다'며 따라갈 때까지만 해도 당신은 몹시 들뜹니다. 이제야 모든 것이 비로소 제자리로 돌아갈 거라고, 죽은 딸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겠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잘해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안도의 한숨을 쉬죠.


그런데, 화장실에 갈 때까지만 해도 즐거워 보이기만 하던 로라가 자리에 돌아와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평온하게 흘러갈 것만 같던 휴가에의 기대를 완전히 박살 내 버립니다. 게다가 이제야 죽은 딸을 마음에 묻을 수 있게 되었나 했더니 웬걸, 아이의 혼령이 당신과 아내 사이에 앉아 웃고 있다니요.


'더 이상 슬퍼하지 말아요. 우리 언니한테 당신네 어린 딸이 보인다네요. 당신과 남편 사이에 앉아 웃고 있다고요'라고 말이야. 난 기절하는 줄 알았어. 아니, 반쯤은 기절했어. -14쪽


글쎄요.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누가 판단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슬픔은 많은 것을 통제불가능의 영역으로 밀어 넣습니다. 믿을 수 있던 확고한 세계의 지반이 흔들리는 감각은 한 사람의 많은 것을 바꾸어 놓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를 둘러싼 세계의 질서조차 재편할 때가 있을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무엇이 바뀌었는지, 이제 무엇을 믿고 무엇을 믿지 말아야 할지. 나의 세계를 지탱하던 축을 잃은 인간이 얼마나 쉽게 흔들리고 부서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 짧은 이야기를 읽으면서 많이도 섬칫했습니다. 당신에게 죽은 딸은 당신의 내면을 뒤흔드는 축이 아니었을지 몰라도 아내는 그랬던가 봅니다. 로라의 실종 아닌 실종이 결국 당신의 파멸을 불러왔으니까요.


그 과정에 끼어든 비현실적인 장치들이 던지는 질문들이 시종일관 날카로웠어요. 불안이 인식의 지반을 얼마나 쉽게 흔들어 파괴하는지, 그로 인해 현실과 환상이 얼마나 빠르게 뒤섞이는지. 자신의 불안을 통제하지 못하는 한 사람의 인간이 얼마나 빠르게 망가질 수 있는지 알고 있느냐는 질문이. 초자연적인 현상이건, 개인의 소망이 투영된 환상이건 그 모든 것은 어떤 사건의 징후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물음이 결국 향하는 답은 한 곳이더군요. 인간은 이토록 나약하고 쉽사리 흔들리는 존재라는 사실요. 그래서, 어쩌면 차라리 '흔들리고, 슬퍼하고, 감정을 표현해야 할 때 표현하는'것이 불안이 해일처럼 덮쳐오기 전에 자신을 지키는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사실. 그래서 한편으로 안타까워요. 차라리 아이의 죽음 앞에서, 그 죽음을 충분히 로라와 함께 애도하고 슬퍼했으면 그 이후의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싶어서.


이렇게 지독하게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인물을 만난 이후엔 씁쓸한 기분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아서 퍽 힘들긴 한데... 그래도 한 번쯤 이렇게 만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애써서 불러봤어요. 살펴 가세요, 존. 조심하라는 말을 하는 스스로가 우습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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