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혁, 미묘한 메모의 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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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를 유난히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책상에는 필연적으로 수많은 메모 도구와 필기구가 난립할 수밖에 없다. 무엇 하나를 결정해 두고 쓸 수 없는 까닭이다. 이것은 이 용도로 저것은 저 용도로 필요하다. 무엇인가를 반드시 기록해야겠다는 욕망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도 납득하고 싶지도 않은 온갖 이유들로.
우리는 왜 메모를 할까? 본능일까, 강박일까. 멍하니 앉아 있을 때 나도 모르게 뭔가 적고 있다.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9쪽
바로 이런 사람들이 메모광이 된다. 뭐든 떠오르는 대로 쓰지 않으면 조바심이 나서 못 사는 병에 걸리는 거다.
메모를 즐겨하면 어떤 점이 좋을까. 순발력이 좋아진다. 관찰력도 동반 상승한다. 문제나 상황을 조감하는 능력도 발달한다. 왜냐하면 메모는 대부분 조각난 파편이고 추후 그것을 다시 살펴볼 때 반드시 통합하여 판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기록할 수 없기 때문에 우선순위를 판별하는 판단력이 빨라지고 관찰하거나 생각하는 바를 구조화하는 능력이 좋아진다. 쓰다 보니 어쩐지 메모를 열심히 잘 오래 하면 초능력이 생길 거라고 비약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드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 상당히 '수행능력'이 업그레이드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건 확실하다.
이 책을 굳이 분류하자면 나는 에세이가 아니라 자기 계발서나 실용서에 넣을 것 같다. 실용적인 메모의 기술 몇 가지를 배울 수 있으며 메모 전문가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김중혁 작가가 거쳐간 수많은 메모 도구들에 대한 팁과 간략한 브리핑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메모가 창작자에게 남기는 긍정적 영향도 몇몇 사례를 통해 살필 수 있다. 이 짧은 책에 이런 내용이 다 들어가 있다니 의심의 눈길로 쳐다볼 법한데 진짜다.
도구는 신체의 연장이다. 연필로 글을 쓸 때 우리 뇌는 연필처럼 생각한다. 만년필로글을 쓸 때는 사각거리는 감각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타자기를 사용할 때는 총을 쏘는 것처럼 자판을 두드린다. 어떤 도구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메모의 내용이 달라진다면, 우리는 여러 개의 신체를 가지고 있는 셈이며 그걸 마음대로 끼워 맞출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려면 도구를 이해해야 한다. -40쪽
근처에 있는 종이를 집어 들자. 거기에다 뭐라도 적어 보자. 갑자기 떠오르는 단어도 좋다. 단어는 또 다른 단어를 불러올 것이다. 단어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들의 마을을 만들 것이다. -197쪽
내게도 서너 종류 용도로 나누어 쓰는 메모장이 있는데, 그 메모들을 틈날 때 종종 들춰본다. 가끔 이딴 걸 남겨두다니 믿을 수 없다며 스스로의 무치함을 한탄하게 하는 것도 있고, 과거의 나는 천재였나 하며 자화자찬하게 하는 메모도 있다. 또 어떤 것은 내가 완전히 잊고 있었던 과거의 한 순간을 되살려주는 기억의 조각이나 다름없기도 하다. 제가끔의 색과 가치와 존재로 빛나는 기록물들의 존재는 늘 고맙고 반갑다. 비록 어느 수준을 지나치면, 부동산의 문제를 고뇌하지 않을 수 없게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