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그 현실이 나를 살게 하고

서미애, 잘 자요 엄마

by 담화

안녕, 선경 씨. 아무도 안녕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날씨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누군가에게 말을 걸기에 앞서 묻지 않을 수 없는 그 질문을 할게요, 안녕하세요.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설상가상이란 말이 있죠. 선경 씨에게 닥쳤던 그런 종류의 일들이, 지난 한 주 동안 내게도 압축적으로 일어났었어요. 정말이지 문자 그대로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였죠. 한 번에 하나씩 처리하기도 쉽지 않은 종류의 일들이었는데 그것이 하루 이틀 상관으로 덮쳐 들면 정말이지 뭐 어쩌라고, 나도 모르겠으니까 알아서 해...라는 심정이 되고 말아요. 내게 닥쳤던 일은, 글쎄 뭐랄까 엄청나게 신경이 쓰이고 말도 못 할 정도의 노동이 필요한 일과 더불어 마음이 엄청나게 소모되는 일과... 여하간 그런 일들이 뒤섞인 것이었어요. 상주가 되어서 장례를 치렀고 그 와중에 내가 주체가 되어 있기 때문에 결코 미뤄둘 수 없는 중요한 일이 두엇이나 (하필이면!) 얽혀 있어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의 심정으로 보낸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거짓말처럼 지옥 같은 시간을 지내고 나니까 또 한 주가 돌아와 있네요. 우습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해요. 한 주일 전의 나는 바로 그다음 날 새벽 어떤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는데요. 인간의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인가 봅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그 판에 박힌 것 같은 말이 위로가 될 때가 다 있네요.


아무튼요.

선경 씨도 만만찮았던 것 같아요.

아무리 범죄심리학계에 투신하고 있는 당신이라 해도 설마 하니 전 국민이 치를 떠는 범죄를 저지른 살인범이 당신의 이름을 입에 올렸을 때는 무섭지 않았을까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랬을 것 같아요.

희대의 연쇄살인마가 당신을 콕 짚어서 유일한 면담 상대로 지목한 것만도 세간의 관심을 끌어서 부담스러웠을 테고 영문을 알 수 없으니 마음이 복잡했을 거예요. 그렇게 심란한 상태로 어쩐지 주도권을 빼앗긴 것만 같은 첫 번째 면담을 마치고 집에 와 보니 남편과 전처 사이에서 난 어린 딸이 와 있더란 말이죠. 그것도 아이를 키우던 조부모의 집에서 화재가 나서, 아이에게 세상에 남은 유일한 보호자는 선경 씨의 남편밖에 없으니 이젠 선경 씨는 꼼짝없이 그 아이, 하영이를 키울 부담을 지던가, 세간의 비난을 감수하며 하영이를 거부하든가 할 수밖에 없었고요.

꼭, 그 유명한 연쇄살인범이 당신을 지목했기 때문에 온 세상의 시선이 선경 씨에게 다 몰려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당신이 하영이를 거부했을 것 같진 않아요.


"이런 생각은 해봤어요. 여러분이 어릴 때 경험했던 일들, 나비나 잠자리를 잡아서 날개를 떼어내거나 강아지를 발로 차거나 또 아까 얘기한 것처럼 병아리를 옥상에서 떨어뜨리는 등, 그런 경험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어떤 잔상을 남겼느냐 하는 겁니다." -51쪽


"타고나는 부분이 있기는 하겠죠. 하지만 그게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는 얘기예요.
(...)
어릴 때 둘 다 같은 호기심으로 출발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에게 주어지고 선택한 환경에 따라 그 결과는 이렇게 다를 수 있는 거죠." -52쪽


그저 조금도 감출 생각도 없이 당신에게 있는 그대로의 미움과 원망을 드러내는 하영이의 감정을, 받아줄 수 있는 만큼은 받아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당신은 곧 또 다른 난관에 봉착합니다. 당신이 학생들에게 강의하면서 늘 입에 담았던, 유년기에 발현되는 싸이코패시의 전형적인 특징을 열한 살 하영이에게서 발견하게 되었으니까요. 머릿속에 있는 지식을 현실의 실천 영역으로 가져오는 건 정말이지 보통의 의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이 와중에 우스갯소리를 하자면, 그게 그렇게 쉽다면 모든 수험생은 1등급일 테고 다이어트에 실패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요.


가장 사랑을 주었어야 할 사람으로부터 학대를 당한 성인 연쇄살인마와, 마찬가지의 이유로 소위 싸이코패시- 내지는 도덕감정과 공감의 뇌 배선 문제를 겪고 있는 어린아이를 동시에 겪게 된 당신의 기막힌 상황과 곤란에 진심으로 안타까움을 느껴요. 보통의 사람들이 어떻게 도울 수 없는 문제임을 알지만, 그래도 인간적인 안타까움이란 게 있잖아요.

그런 것을 키우기 위해서 이야기가 꼭 필요하고, 보다 극단적인 상황에서 올바름과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기 위해서 이런 이야기가 쓰여지고 읽히는 게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어요. 그럼에도 그 안에서 선경 씨처럼 늘 최악의 상황에서도,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고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분투하는 사람이 있음을 보게 되는 건 2차원 밖의 우리에게도 늘 위로가 되어 주죠.

그런 의미에서 고맙고 미안해요, 선경 씨. 그리고 현실에 존재할 또 다른 수많은 선경 씨들에게도요.


나도 이젠 힘내서 다시 현실로 돌아오려고요. 언제 어디선가 또 만나요. 하영이와 함께 웃고 있는 당신을 또 만나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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