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 진이, 지니
진이 씨, 안녕. 당신의 이름은 완벽한 회문 palindrome이네요. 앞으로 읽어도 이진이, 뒤로 읽어도 이진이.
이런 이름을 가진 친구들은 늘 놀림의 대상이 되었던 어린 시절을 잠시 생각하게 되어요. 당신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어떤 사람이 생각나요. 참 이상하죠, 우연의 일치로 이름만 같을 뿐인데 참 닮았거든요. 사고방식이라든가 어투, 행동 패턴 같은 게요. 이런 것 역시 소위 '과학적'인 태도는 아니겠지만요, 뭐 어때요. 지금 과학 하는 시간도 아닌데.
스승은 종종 내게 말하곤 했다. 동물의 신호를 의인화해선 안 돼. 과학도로서 적절한 태도가 아니라는 지적이었다. -15쪽
영장류 센터 사육사로서의 근무 마지막 날, 당신은 참으로 얄궂고도 사소한 한 통의 전화를 받습니다. 어딘가의 호숫가 근방 별장의 별채에 화재가 났는데, 침팬지 한 마리가 도망쳐서 나무 꼭대기로 올라가 버려 침팬지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마지막 출근날에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 일정으로 그간 돌보아왔던 침팬지의 출산을 보고 있던 당신이었는데, 왜 하필 그 전화를 당신이 받게 되었던 걸까요. 엄연히 인수인계도 다 끝난 후임이 있었는데, 왜 하필 당신이 그 현장에 출동해야 했던 걸까요. 말마따나, 영장류 센터는 구조 기관이 아니라 연구 기관일 뿐인데요.
후임 사육사인 홍유미 씨에게 일을 넘기고 당신은 그냥 퇴근해도 됐을 거예요. 출국 시간에 맞추어 공항 갈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어도 다들 납득했을 거라고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진이 씨가 그러지 못했던 건, 그 구조 요청 전화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건 반년 전, 킨샤샤에서 밀렵당한 보노보가 실려가는 걸 숨어서 지켜보고만 있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죠. 그 순간 느꼈던 무력감이 오래도록 당신을 잠식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도리없이, 당신은 피해 갈 수도 있었던 사고의 당사자가 되고 맙니다. 속상하게도...
내가 무엇을 꿈꾸었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뭘 할 수 있느냐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생명을 다루고 연구할 자격이 내게는 없다는 점이었다. 그것을 그날 밤에야 알아차렸다. 길 건너 골목에 숨어 그 아이가 철장에 갇힌 채 삼륜차에 실리는 걸 보던 순간에, 삼륜차가 비바람 속으로 사라져 버리던 그 순간에. -77쪽
이렇게 자신에게 혹독하고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당신은 구조 요청 전화에 응답해 화재가 난 별장에서 문제의 보노보를 구조해 돌아오는 길에, 도로에 뛰어든 고라니를 피하려다 일어난 교통사고 탓에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리게 되죠. 그리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인간 이진이가 아니라, 구조한 뒤 '지니'라고 이름 붙여준 바로 그 보노보의 몸에서 깨어났다는 사실을요. 그러니까 소위 영혼체인지가 발생한 거예요. 난감하기 짝이 없는 이 상황에 기적처럼 마주친 조력자는 뜻밖에도 사육사 이진이로서 근무했던 마지막 날 오후, '혹시 어디가 아픈 건 아니냐고' 잠깐 염려의 말을 건넸던 관람객 민주였어요.
민주와 마주친 후 핸드폰을 귀에 대는 시늉을 하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시늉을 연신 해 보이며 갖은 문명적 행위를 선보인 끝에 마침내 민주는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죠.
그것은 동물의 눈이 아니었다. 서른한 해를 살아오며 수없이 마주쳐 온 눈, 감정이 담긴 '인간의 눈'이었다. 절박하게 답을 원하는 눈이었다. 자기 모습이 상대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문제가 보노보에겐 목숨만큼이나 중차대한 문제인 모양이었다. -155쪽
그리고 당신은 민주에게 부탁합니다. 마땅한 비용을 지불할 테니, 보노보가 된 자신을 이진이의 몸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 달라고. 몸만 찾으면 되는 게 확실하냐고 연신 따져 묻는 민주에게 '만나면 알게 되겠지'라고 불확실함을 끌어안은 채, 자신 있는 척 대답을 하면서요. 얼마나 절박했을까요. 얼마나 황망했을까요.
인간 이진이와, 보노보 지니의 영혼이 공존하는 지니와 민주의 여정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건 어쩌면 익히 알고 있던 평범한 사실들 인지도 모르겠어요. 아무런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구나. 또는 아무런 인과 없이 그야말로 교통사고처럼 닥쳐드는 일들도 있구나. 도저히 하나의 이야기에 공존할 수 없는 깨달음인 것 같은데 기묘하고 기이하죠. 삶에 대한 상반된 통찰이 당신과 민주를 통해 전해집니다. 그것도 도저히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방식으로요.
그러니 민주는 '괜히 신세 망칠 일 하지 마'라는 머릿속의 경고를 무시하면서도 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당신은 '살아 있는 한,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는 다짐으로 대단원을 향해 나갈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젠 민주도, 당신도 이 여정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너무 잘 알게 됐어요. 그러니까 그 사실을 알면서도 섣불리 입에 올리지 않고 보노보가 좋아하는 파인애플 맛이 나는 사탕을 하나씩 입에 문 채 호숫가를 바라보며 침묵을 공유하는 장면에 이르러선 눈이 붓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거예요.
왜 하필 내게,라는 질문이 얼마나 공허한 줄 알면서도 우리는 늘 스스로에게 되묻습니다. 하고많은 사람 중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냐고. 세상에 난데없이 닥친 비극만큼 개연성 없는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세상은 종종 그렇게 대비할 수 없었던 일들로 한 사람의 삶을 크게 휘저어놓곤 하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 줄 알면서도 기꺼이 앞으로 발 내딛기를 선택하는 용기를 발휘하는 사람을 보면서 우리는 다른 어떤 곳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감정을 느끼죠. 그 마음의 이름은 숭고함입니다.
아기를 보여주며 자랑스러워하던 어미 팬의 표정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나는 마른침을 넘겼다.
내 인생이 행복했다는 말은 못 하겠다. 그래도 불운하지만은 않았다고 믿고 싶다. 어쨌거나 전력 질주로 살 기회가 있었으므로. -355쪽
무어라고 이 글을 맺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당신의 평화를 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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