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해, 라비우와 링과
어떤 이야기가 굉장히 아름답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영화건 소설이건 에세이건 형식은 그다지 관계가 없다. 다만 그 이야기를 만든 사람이 보여주고자 하는 어떤 풍경, 특히 심상이 머릿속 어딘가에 달려있는 종을 마구 쳐댈 때가 있고, 순간 내 마음에도 스쳐 지나간 흐릿한 정경을 빨리 어디에든 옮겨놔야겠다고 허둥지둥하게 할 때가 있다. 이 소설은 동시에 두 가지 일을 모두 해냈다. 120쪽 남짓한 짧은 소설이.
화자인 주영은 무기력한 대학생이다. 그 자신의 말을 빌자면, 연속적인 실망과 불안으로 빚은 인간 모양의 케이크라서(44쪽) 조금만 건드려져도 깨어지고 망가질까 봐 그렇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미래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나를 둘러싼 사물, 분위기, 정보와 지식, 사람들, 대화, 내 안의 생각과 감정이 뚜렷하게 느껴지는 날이 많지 않았다. 온 세상에 윤곽선이 하나도 없고, 그저 덩어리로 보였다. 그래, 사람들에겐 생각이 있는데 내겐 항상 기분만 있는 것 같았다. -36쪽
대략 이런 인상을 가진.
계절학기를 맞아서 새 룸메이트를 맞게 된 주영은 그 룸메이트가 브라질에서 온 교환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 지금 이건 올해 새내기가 된 큰아이가 보낸 첫 방학과 너무나 흡사해서 나는 너무 쉽게 이입하고 말았다. 자신과 성향이 극도로 다른 외국인 룸메이트를 만나면 어찌하느냐고 걱정이 산더미 같았더랬다.
그걸 걱정해야 할 정도로 외국인 학생이 많냐고 물었더니 학생의 1/3은 외국인이라고 답했었다. 그땐 그랬나 보다, 하고 잊어버렸는데 이 소설을 보니 정말 외국인 학생이 많기는 많은 모양이다.
딱히 잘 지낼 생각도, 그렇다고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고 지낼 생각도 아니었으나 주영은 어떤 계기로 이네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마음을 연다. 엄청나게 대단할 것도 없이 별것 아닌 흔하디 흔한 배려의 말 한마디였으나, 그 사소함이 주영에게는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너무나 바라고 있었던 사소한 환대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게, 타인을 환영하는 한마디의 말. 참 별 것 아닌 그 말 한마디가 요즘 참 귀하구나 하는 생경하고 당혹스러운 깨달음이 뒤이어 찾아왔다. 이네스의 언어는 선명한 리듬과 온통 둥근 소리로 가득했기에(53쪽) 주영은 한층 더 호기심을 갖는다. 작은 호기심은 곧 보다 넓은 영역으로 퍼져 나간다. 좋은 사람 하나의 영향력이 이렇게 크다,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젯밤에도 이네스는 내 질문에 복잡하지만 솔직한 답을 굳이 해주었고, 나는 그런 이네스의 말들이 마음에 들었다. 정성스럽고 세세하고 입체적인 발화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59쪽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어서 '정성스럽고 세세하고 입체적인 발화'를 하지는 못하지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귀하고, 심지어 점점 희귀해지고 있다는 건 잘 안다. 우리는 극도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세상을 살고 있으니까. 자신의 시간을 쪼개어 그런 품이 드는 대화에 할애할 의지가 있는 사람도 드물어질 것이다. 어쩌면 글을 쓰는 사람이 많아지는 건 그래서가 아닐까도 생각한다. 빈 화면은, 빈 노트는 얼마든지 상냥하게 기다려 주니까 말이다. 바로 해야 할 말을 찾지 못해서 고심하고 횡설수설 이 말 저 말을 늘어놓는 순간에도 조금도 보채지 않지 않나. 말을 자르고 대신 요약해 버리는 무례를 저지르지도 않고. 그렇게 쏟아놓은 말을, 이제는 누가 귀 기울여(시선을 기울여) 들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도 인지상정일 테고.
나는 이네스가 브라질로 돌아가는 날을 상상했다.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되게 친한 사이도 아닌데 그 상상만으로 처참하게 외로워졌다. 마음에 방이 여러 개가 있고, 이네스가 그 모든 방에서 한꺼번에 체크아웃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96쪽
천천히 눈을 깜빡여가며 이 문장을 외우듯이 여러 번 되뇌어보았다. 마음속에 열어두었던 방 여러 곳에 짐을 부려두었던 친구가 때가 되었다며 체크아웃을 하고 나가다니, 상상만으로도 서늘하다. 한편으로 그 쓸쓸함이 찬바람처럼 피부를 쓱 스치고 지나가는 듯한 기분에 이런 문장을 쓰는 작가가 부럽고 또 부럽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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