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이, 게임코러스
이 책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소개하고 싶은 영상 하나. 민음사의 조아란 부장(출판계의 아이돌이죠)님이 만난 출판계 인사 중 한 분, 워크룸 프레스의 이동휘 편집자님의 인터뷰 영상이다. '찍먹 독서'가 궁금하신 분은 한 번쯤 영상 시청을 해보셔도 좋을 듯하다. 아무튼 각설하고.
https://youtu.be/K2YJDu_-JxY?si=BGx19mdAM9dwS_vR
게임을 이론적으로,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문화 장르적으로, 여하간 전방위적으로 다루는 책을 번역 제안하여 결국 워크룸프레스에 편집자로 입사하신 분이기도 하다. 그 책은,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08296834
이런 책인데 발간되자마자 사 놓고는 여전히 다 못 읽어서 아직 이 책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는 상태이므로, 아무 말도 안 한 척 슬쩍 넘어가겠다.
오늘 말하고 싶었던 책은 이것.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6557914
무슨 열혈 게임 매니아였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다. 그러나 게임에 대한 이해도가, 나이와 성별로 따졌을 때는 상당히 높은 축에 속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온갖 게임 콘솔을 다 섭렵하고 기어코 나를 게임의 세계로 전도한 바 있는 혈육의 존재에 힘입은 바가 클 것이다. 뭣도 모를 때는 컨텐츠로 좋아하던 것을, 매체적 특성을 생각하며 관점을 바꾸게 되면서 조금 더 깊이 있게 알고 싶어서 관련서적을 이것저것 파기도 했다. 아무튼 그런 관심의 방향을 유지하고 있다 보니 이런 책이 출간되면 외면하기 어렵다. 뒤표지를 보면, 게임의 UI를 고대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와 동일한 효과와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일단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건 꽤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다음 주장, "우리는 순전히 재미를 위해 게임을 한다" 역시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만 "그래도 게임을 하는 이유는 생존하는 이유와 같다"를 거쳐, "생존의 목적은 오직 쾌이다"에 이르면 독자 2/3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지 않을까 싶어 아주 약간의 우려가 되는 것이다. 나로 말하자면 일단 100% 동의할 수밖에 없는 주장을 건네오는 책도 기꺼이 집어 들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좀 들어보겠어? 그럼 거기 좀 앉아봐,라고 확고하게 제 주장을 내세우는 패기만만한 책을 더 먼저 펼치게 되는 성향이라(무슨 말을 할지 기대까지 된다면 내가 이상한 건가) 심지어 얇기까지 한 이 책을 읽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고 말해야겠다.
결국 UI는 플레이어가 게임에 참여하고자 진입하는 통로인 동시에 플레이어의 참여를 유도하고 유혹하며 명령하는 장치이다. 우리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연극 무대에서 게임의 UI와 정확히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구성원을 찾을 수 있다. 바로 시민합창단, 즉 코러스다. 플레이어와 게임 플레이 사이에서 둘을 연결하는 UI처럼 코러스는 관객석과 무대 사이에 따로 설치된 오케스트라 위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합창단으로서 관객이 무대 위 연극 세계에 몰입하도록 유도했다. -14쪽
동의할 만한 주장 아닌가. 저자의 대전제를 수긍하고 읽어나가다 보면 오한이 느껴지는 순간이 여러 번 찾아오는데 이런 때이다.
UI는 어떤 일관된 형태를 유지함으로써 플레이어에게 자신이 '믿을 수 있는 목소리'임을 약속하는 것이다.
(...)
그런데 사실 이 약속의 근거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
오히려 플레이어가 그들의 항상성만을 보고 일방적으로 그들을 믿어버린 것에 가깝다. 이는 마치 민주주의에서 시민 혹은 대중의 목소리가 그 머릿수만으로 허황된 신빙성을자동으로 획득하는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28쪽
UI가 약속한 공고한 일관성에 사실 아무 근거가 없다는 점은, 곧 UI가 그 일관성을 스스로 언제든지 박살 내 버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29쪽
장르에 관계없이 암묵지처럼 모두가 받아들이고 있는, 세계를 이루는 골조를 부숴버리는 폭력처럼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세계의 규칙이 깨어지는, 즉 일종의 합리적 기대를 배반하는 동시에 상쾌한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균열처럼 느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사례로 들고 있는 것이 <언더테일>이라는 게임인데, 플레이해 본 적은 없는데 본문에 소개된 내용만으로도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불변하는 것, 믿을 수 있는 유일한 프레임으로서의 UI는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라기보다는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쪽일까. 낯선 상황에 대한 긴장과 익숙한 구조가 박살나는 데서 느껴지는 쾌감을 동시에 설계하다니 이건 좀 천재 아닌가. 한문장으로 줄여놓고 보니 1+1=2라는 수식을 써놓고 굉장하다며 박수를 치고 있는 촌극 같긴 한데 그것을 하나의 총체적인 경험이 되도록 구현한 건 진짜 대단한 게 맞다...
여하간.
꼭 게임이 아니라, 어떻게든 소비자의 눈길을 끌어와야 하는 무거운 부담감에 늘 시달리는 창작자들, 특히 상업 장르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굉장히 많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을 책이라 생각한다. 항상 그렇듯 내가 꽂힌 부분에 한해서만 이야기하고 말긴 하지만, 당연히 이것이 전부가 아니므로, 똑같은 말을 또 반복한다. 읽어보세요, 진짜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