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케 마리코, 이형의 것들
호러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섭기 때문이다. 아주 간단한 이유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하간 모든 역접 접속사를 동원해서 말하건대 세상의 모든 일들에는 예외의 구멍이 존재하기 마련이어서 싫고 무섭고 혐오스럽고 기타 등등의 모든 사유가 존재함에도 그 일을 할 수밖에 혹은 하지 않고서는 못 견디게 되는 상황 또한 발생한다.
북스피어로 말하자면 우리나라 장르문학계에서 빠트릴 수 없는 브랜드가 아닌가. 북스피어하면 떠오르는 대박 작가들의 이름도 그렇거니와 아름다운 북 디자인도 눈길을 끄는 데 한몫한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눈길을 끄는 어떤 시리즈가 있었다. 껍데기에 매우 종종 수시로 혹하는 까닭에 그 시리즈를 눈여겨 보게 되었다.
시리즈명은 이판사판이라고 하는데, 이판사판의 뜻을 굳이 여기서 설명해야 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하므로 일단 넘어가고 책날개에서 일부만 인용하겠다.
한데 오늘날 ‘이판사판’은 ‘끝장’을 의미하는 말로 전이되었다. 이판사판 시리즈는 지금껏 북스피어가 만들어 온 장르문학의 맥을 이어 나갈 도서들로서 어차피 이렇게 이름 지어도 기억하지 못할 테고 저렇게 이름 지어도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이판사판 시리즈’라는 이름은 안 잊어버리겠지,라는 의미를 담아 만들었다. 이 시리즈로 딱 10권만 만들고 끝장을 볼 생각이다.
오… 기백.
옛날부터 나는 기백으로 옹골찬 것엔 사족을 못 썼다(사람은 보는 것만으로 만족. 옆에 그런 사람 있으면 좀 피곤해진다). 박력으로 그득한 이 시리즈의 컨셉 노트에 완전히 홀렸다. 제가 기억하고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기합 한 번 넣어보고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호러가 떡하니, 진입장벽이 이렇게나 거대하다니. 이걸 어쩔까나. 옛날옛적 미미여사님의 기담집 한 권 읽고 몇 날 며칠을 잠이 안온다고 무섭다고 *병*병을 떨었더니 진저리를 낸 남편이 책을 압수해 간 전적도 있는 나인데.
일단은 아묻따 go로 가기로 한다.
첫 번째 이야기를 읽었다. 괴괴한 시골길을 걷던 어떤 남자가(남자였나) 길바닥에서 떠억하니 마주친 어떤 사람의 정체라고 해야 하나 얼굴이라고 해야 하나. 오 별로 안 무섭다. 괜찮았어, 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두 번째로 넘어갔다.
숲속의 집. 친구와 친구의 부친이 사고로 죽고 난 집에 무척 기분 나쁜 기운이 감돌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그 집에 들렀던 화자는 불현듯 어떤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음. 이것도 괜찮은데. 호러 별 거 아니었어. 나이 먹어서 무서운 게 없어진 건가. 그렇게 나는 용기백배하여 또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남편이 죽었다. 남편과 살던 집에 홀로 남게 된 아내는, 집안에서 생뚱맞게도 어떤 여자의 혼을 발견한다. 그녀와 결혼하기 이전부터 남편을 짝사랑해 오다, 결국은 이루지 못한 사랑에 절망하고 자살한 여자의 혼령을. 죽었으면서, 이미 사랑했던 남자도 죽고 없는데 그 남자의 부인 주변을 맴도는 무해한 듯 몹시 유해한… 좀(많이) 오싹하다.
그래도 절반이 넘었는데 여기서 포기하기엔 억울하다. 마음을 다잡고 페이지를 넘긴다.
스승의 장례에 참석했다가 기묘한 산장을 소개받아 하루 머무르는 방송국 피디는 산장의 여주인에게 유령이 나오는 지하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마침 괴담 취재를 다니던 후배 피디에게 산장을 소개한다. 취재를 다녀온 후배 피디는 갑작스레 행방이 묘연해지고, 어느 날 갑자기 화자에게 전화를 걸어와 제발 자기를 도와달라고 울며 하소연한다. 도의적 책임을 느낀 화자는 그를 집으로 부르는데, 부르는데… 부르는데! (아악, 책 집어던질 뻔)
마지막 이야기는 갑작스레 유산한 언니의 집에서 지내게 된 화자가 이웃에 살다 죽은 여자와, 후에 태어난 조카 사이에 기묘한 연결고리가 생겨나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 모두가 명확한 기승전결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달리 말해 읽는 사람에 따라서 기절할 정도로 무서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이게 뭐야, 별 거 없네 싶은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건 되도록 많은 사람이 읽고 많은 해석을 내놓을수록 굉장히 무서운 이야기가 된다. 상상력이 좋은 사람들은 섬찟해질 정도로 무서움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다. 명백하게 무섭고 공포스러운 것이 아니라, 뭔가 알 수 없는 것이 흘러나올 수 있도록 공간과 인식의 틈을 비틀어 무대를 마련하는 이야기에 가깝다.
그런 까닭에 누구나 즐겁게(?) 꺄악 무서워, 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쓸데없는 공상 좀 하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무서워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리라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기척만 드러내어 뭔가 싸늘한 음기 같은 형태로 내 곁을 쓱 지나가기도 했다. 심야에 아무도 없는 욕실에서 목욕물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향로 속에서 하늘하늘 오르던 향 연기가 창문이 모두 닫혀 있는데도 문득 강한 소용돌이를 이루더니 남편 영정에 휘감기는 것을 본 적도 있다. -140쪽
그렇게 나는 이승과 저승을 잇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음매 같은 것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 이음매에는 언제나 그 여자가 있다. 지금까지 일어난 많은 일들을 떠올려 봐도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고 아무런 설명도 들은 적 없지만 지금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오싹해지곤 한다. 동시에 한없이 그립고 감미롭기까지 하다. -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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