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J. 클룬, 벼랑 위의 집
아주 오랫동안 외롭고 쓸쓸했지만 마침내는 행복해진 라이너스 베이커 씨, 요즘은 어때요? 삶을 한껏 만끽하고 계실까요. 분명 그러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누군가 라이너스에게 외롭냐고 묻는다면 그는 깜짝 놀라 얼굴을 찌푸릴 것이다. 그건 뜬금없는 걸 넘어 충격적인 말이니까. 그리고 외롭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사실은 외롭지만, 처절하게 외롭지만 말이다. -41쪽
너무 외로워서, 그 외로움을 입에 담아 인정하는 순간 한층 더 외로워질 것을 무서워하는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때론 그렇지 않은 척하는 것이 그 감정에 매몰되는 것을 막아주기도 하니까요. 다만 그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드문 탈출구를 알아보는 것마저 막아버리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겠지만요.
당신이 사는 세계엔 마법적인 능력을 타고난 아이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을 격리하여 관리하는 부서, 소위 마법아동관리부서 DICOMY - Department in Charge of Magical Youth - 에서 일하는, 뭐였더라? 사례연구원? 조사관? 하여간 굉장히 재미없고 무지하게 현실적인 직책명이어서 잊어버렸어요.
다시 찾아볼 의욕도 안 생기는 직무에 종사하고 있는 분이었죠, 베이커 씨. 굉장히 실례되는 말이긴 하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떡해요. 마법 이능을 가진 아이들을 모아 키우는 고아원들을 방문해서 아이들이 잘 '관리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그런 일을 하고 있었잖아요.
"제가 할 일은 고아원을 점검하고 최상의 상태로 유지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까지입니다. 아동들의 복지는 중요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개인적인 상호작용은 가급적 피해야지요. 인식의 편향을 가져올 수 있으니까요." -56쪽
어쩌면 이렇게 구구절절 옳은 말씀만 하시는지 하품이 다 날 지경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성실하고 시시하게 매일을 영위하던 당신은 어느 날 날벼락을 맞습니다. 무려 최고 경영진의 호출을 받았으니까요. 내가 뭘 잘못했나, 지난 업무 내역은 물론이고 온갖 시시콜콜한 일상을 복기하며 초조해하는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모난 돌처럼 정 맞을 짓을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렇다고 엄청난 업무 성과를 올리고 있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경영진 호출이라뇨. 해고 통지서가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그런데 뜻밖에도 당신에게는 특별한 임무가 주어집니다. 바로 외딴섬에 자리한 어떤 고아원의 시찰이었죠. 그리고 경영진은 당신에게 신신당부를 거듭합니다. 조심하라고, 이 일의 중요성은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이렇게 잔뜩 겁을 주었으니 긴장하지 않을 도리가 있나요.
섬으로 가는 길에 미리 받아두었던 고아원에서 보호 중인 아동들의 파일을 펼쳐 본 순간의 아득함에 깊이 공감합니다. 정신적 안녕에 쾌차를 빌지 않을 수 없겠더라고요. 심지어 그 아이들을 만나보기도 전, 당신을 섬에 데려다 주기 위해 마중을 나와 있던 사람의 정체를 알게 된 순간엔 아마 혼절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제 기억이 맞다면 마르시아스 섬에 있는 고아원에 드디어 발을 들인 당신을 처음으로 환영해 준 아이는 노움 gnome 여자아이인 탈리아였을 거예요. 네, 정원에 흔히들 놓아두는 땅요정 석상, 그거 말이죠. 전형적인 노움답게 턱수염도 숭숭 난 그 애가 여자아이였다는 사실 정도는 그냥 웃으면서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죠. 동전 같은 것들을 혼절할 정도로 좋아하는 어린 와이번 소년 시어도어, 숲 정령인 피, 심각하게 부끄러움을 타거나 겁을 먹으면 포메라니안으로 변해버리는 샐, '호텔 직원'이 되는 것이 꿈인 무척추심해생물(해파리와 해삼의 혼종이니 당연한 일인가요) 같은 아이 천시, 무려 악마와 인간의 혼혈인 천방지축 여섯 살 소년 루시. 종종 나는 죽음을 가져오는 자이며, 세계를 파괴할 자라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려서 당신을 졸도하게 만들곤 하지만 고아원 원장님의 말마따나, 편견을 거두고 본다면 그건 어린애들이 흔하게 떠벌리는 허풍일 뿐인데 말이죠.
고아원과 아이들을 둘러보면서 당신은 점차 최고경영진의 의중을 깨닫게 됩니다. 고립된 섬에 만들어 놓은 고아원에 가장 위험한 (혹은 불가사의한) 종족의 유전자를 타고나서 백안시당하는 아이들을 모아두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아 또 다른 격리 방법을 고안하기 위해서 당신을 관찰자 겸 감시원으로 그곳에 보냈다는 사실을요.
와중에 본섬에서 이 아이들을 배척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그러니까 온갖 혐오의 메시지를 새긴 배를 띄워 보내는 방식으로요. 이제 당신의 마음이야말로 풍랑 맞은 조각배 신세가 될 거라는 건 너무도 뻔한 일이죠.
시간이 가면 갈수록, 유별나고 위험하게만 보였던 아이들은 그야말로 그냥 평범한 아이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고 당신이 지고 온 업무적 책임감은 점점 더 무거워졌을 것이며, 외부에서 날아오는 날것의 혐오는 행동하도록 밀어붙이는 압력이 가중되는 상황이 되었으니까요. 물론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에요. 하지만 당신의 선택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해서 그 과정과 마음의 갈등까지 지레짐작해 버리는 건 굉장한 실례겠지요. 그러니까 그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건 이쯤 해둘게요. 제 역할은 라이너스 씨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일을 겪게 됐는지를 간략하게 소개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게 제일 적절하니까요(하지만 당신이 그랬듯 저도 종종 선을 넘는답니다). 그래도 당신이 몹시 기뻤을 순간 하나쯤은 이야기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요.
"대단한 일이었어요. 당신은 안 믿을지 몰라도, 내가 우리 둘 몫까지 믿어요.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다, 라이너스 베이커. 당신을 알게 되어서 정말 기뻐요." -415쪽
누군가가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것만큼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말을 생각해 내기가 쉽지 않네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에서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 있어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었던 당신을 응원합니다. 섬에서 오래도록 행복하세요, 베이커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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