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죄는 대물림되는가

시미즈 레이코, 비밀 THE TOP SECRET(11-12)

by 담화

조금도 안녕한 날이 없을 것만 같은 마키 씨, 지금도 어딘가에서 쪽잠을 자고 있을까요.


그 누구라도 한 번 보기만 하면 홀려버릴 것 같은 상식파괴적인 외모를 갖고 있으면서 부드러운 그 얼굴에서는 좀처럼 떠올리기 쉽지 않은 냉철함과 가차 없음을 좌청룡 우백호처럼 거느리고 있는 마키 실장님.

당신이 이끄는 소위 법의 제9 연구실은 경시청 소속이기는 하지만 사실 거의 독립된 연구소나 다름없죠. 과학수사를 맡고 있지만, 이곳에서 실장님께서 지휘하는 일의 실체는 이러하죠.


2055년 미국에서 개발하고 이듬해 일본에 도입한 수사방식으로, 소위 MRI수사라고도 하는 방식으로 사망 후 일정 시간 내로 적출한 손상 없는 뇌를 MRI 스캔하여 전기 자극을 통해 뇌를 가동해 피해자가 생전에 본 것을 영상으로 띄워 영상 정보를 바탕으로 범인을 색출하는 방법이죠. 이 방법의 현실성은 일단 논외로 하고, 윤리성만큼은 바로 도마 위에 올려도 될 만큼 엄청난 것이죠. 피해자의 시각에 손상이 없다는 전제하에, 고인의 존엄성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죽은 피해자의 인간적 존엄성을 지켜주는 것이 먼저냐, 범죄자의 정보를 얻는 것이 먼저냐. 이건 정말로 첨예한 문제이고 작품의 윤리성마저 횟감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을 만큼 문제적인 설정 이긴 해요. 그러나 시미즈 레이코 선생님은 그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부담하는 대단한 작가이기 때문에, 윤리적 고뇌를 기꺼이 감수하고 외부의 비난과 죽은 이의 고통을 추체험하는 무거운 부담을 동시에 지고 가는 인물들을 가운데에 놓음으로써 독자를 비난보다 당신들에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살인자의 손에 누나 부부를 잃은 아오키도 그렇거니와, 살인범의 자식이라는 멍에를 떠안고 죽은 자들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항상 악전고투하는 당신도 그렇지요. 마치 자신이 생물학적 부친의 죄를 떠안아야 하는 도덕적 책무가 있는 것처럼 매 사건마다 스스로를 던져 넣는 마키 씨를 보고 있으면 윤리적인 문제를 따지고 드는 것조차 스스로가 결백하다 믿어 의심치 않는 자의 오만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매 사건 에피소드가 그렇듯 당신들은 늘 피폐함과 절망의 끝까지 밀려갔다 간신히 돌아오곤 하더군요. 그렇게 돌아오는 힘은 반쯤은 도덕적 의무감이고, 반쯤은 광기인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호숫가에서 젊은 여자의 그로테스크한 시신이 발견됩니다. 범인이 시신으로 연출한 장면을 보건대 이것은 결코 사고사일 수 없으며, 반드시 어떤 의도가 개입한 계획적 살인이라고 판단한 제9는 예의 수사를 펼쳐 결국 범인을 잡아내죠. 하지만 실장님께선 붙잡힌 범인이 마지막으로 남긴 의미심장한 미소에 불길함을 느낍니다. 그 불길함은 틀리지 않아서, 엄청난 진실이 드러납니다. 연쇄살인범이었던 그가, 자신의 정자를 기증하여 무려 100여 명이 넘는, 연쇄살인범의 유전자를 가진 어린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죠. 그가 이런 짓을 벌인 이유는 후에 당신의 팀을 통해 명백하게 드러나죠(그리고 저는 이것이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진 상태에서 밝혀진다는 사실에 몹시 안심했습니다).


그는 자기 안에 있는 ‘살인 유전자’, 이것이 환경에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강력한 유전자라, 어떤 환경에서든 그 DNA만 물려받으면 반드시, 꼭, 그 자식도 성장했을 때 사람을 죽인다.
(…)
자신이 저지른 ‘살인’ 죄는 ‘자신’과 키워준 부모의 죄가 아니라, “유전자의 죄”라는 걸, 그리고 이 DNA는 어떤 환경하에서도 그 특징을 발휘한다는 걸, 그는 입증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72쪽


원래의 연쇄살인범인 하야세가 사형당하고 나서 세월이 꽤 흐른 후 유사한 방식으로 오컬트적인 살인 사건이 또 벌어졌기에, 그리고 그 사건의 범인이 하야세의 유전자를 받은 가장 나이가 많은 아이였기에 이 사건은 굉장한 난제에 빠지게 됩니다. 만약, 유전자의 문제라면, 유전자의 문제가 아니라면?


말하자면 연쇄살인범 하야세의 장남이 되는 두 번째 살인범이 자신을 역송해라, 하고 심드렁하게 말하자 실장님은 진심으로 화를 냈죠. 너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너는 죗값을 치러야 하지만, 너처럼 원치 않게 살인범을 생부로 둔 아이들의 미래에 적잖은 영향을 끼치는 전례가 될 것이기에 오늘 너에게 떨어지는 판단이 중요한 것이며 변호사와 우리가 여기에 와 있는 이유는 그래서라고 일갈하는 그 장면이 너무나 좋았고… 동시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살인범을 생부로 둔 아이, 그건 마키 츠요시 실장님 본인이기도 하니까요.


자세한 이야기를 여기서 할 필요는 없지만, 저는 실장님이 옳은 말을 해주어서 굉장히 기뻤습니다. 이런 말을 힘주어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요.


그래서 판사님이 “자신의 죄를 똑바로 마주해라, 당신은 유전자가 아니라 사람이니까”라는 명문으로 판결했을 때 조금은 울컥했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갖은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려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은 이때에, 올바른 판단의 예를 보여주는 어른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마음이 든든한 일인지요. 판사가 그런 판결을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제9, 그리고 그곳을 이끄는 마키 츠요시의 존재 덕분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제9의 활약을 보는 것은 늘 설레는 일이지만, 그렇다는 건 결국 누군가가 고통스럽게 (그것이 비록 가상의 인물이라 할지라도) 죽어가는 것과 같은 의미라는 걸 생각하면 다소 난처한 기분이 되긴 합니다.


그럼에도, 또 볼 수 있게 된다면요, 마키 씨. 그때는 조금 더 밝아진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많은 굴레를 내려놓고, 조금은 인생을 즐기면서요. 정말이지, 오늘 하루의 무사함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5842520

이전 25화좋은 사람이 되려면 용기가 필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