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헨리, 오헨리 단편선 중 카페의 세계시민
안녕하세요, E. 러시모어 코글런 씨.
미국이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를 겪으며 진정한 세계화를 위한 도약을 준비하던 때에, 그에 몹시도 어울리게 19세기말, 혹은 20세기 초의 디오게네스가 되기를 자처하신 신사분. 만나서 반가워요. 반갑다는 말에는 조금의 과장이나 빈정거림도 없다는 점, 미리 말씀드립니다.
현실의 저는 빈정거림에 상당히 조예가 있는 사람이지만 실제로 맞대면하기 전에 그런 수고를 들이진 않아요. 왜냐면 귀찮거든요. 저는 인간관계를 몹시 성가셔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 까닭에, 이토록 적극적으로 자신을 브랜드화하는 정성이 넘치는 당신이 몹시 흥미로웠어요. 원래 나하고 비슷한 사람에게는 친근감이 들고, 전혀 다른 사람에게는 호기심이 드는 법이잖아요. 저 사람은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 싶어서.
이야기를 듣다 보면 우리는 편지 봉투에 ‘우주, 태양계, 지구, E. 러시모어 코글런’이라고 써 보내면 그게 그에게 확실히 배달될 거라는 믿음이 생긴다. -16쪽
대단하세요. 이 정도로 처음 본 사람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또렷하게 각인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거든요.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단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재주가 내게도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봤을 때 저는 바로 도리질을 치게 돼요.
저는 스스로를 명확하게 규정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자기 객관화를 할 재주가 없어요. 가끔은 내가 경도의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앓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할 정도란 말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는 직경이 1만 2천 킬로미터가 되지 않는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습니다. 저를 그저 지구 행성의 시민 E. 러시모어 코글런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21쪽
이라고 단언하는 당신의 호언장담에는 그만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지요. 이 사람은 진짜배기구나. 마음속으로 기립박수를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이 일을 어쩐단 말이에요, 코글런 씨. 하필이면 이 세상에 많고 많은 작가들 중에서도 당신을 세상에 내보낸 창조주는 O. 헨리라는 사람입니다.
2차원의 세계 시민을 표방하고 있는 당신은 모르겠지만, 이분은 트위스트 엔딩이라는 반전으로 유명한 작가거든요. 아무리 단편소설과 친하지 않은 사람도, O. 헨리의 단편 두 개 정도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을 읽다 보면 누구나 “……”한 기분으로 당신에게 닥칠 반전을 예상하는 건 대단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나의 명상을 깨고 카페 한구석에서 소동이 일었다. -22쪽
우리의 자랑스러운 세계 시민인 당신께서 갑작스럽게 누군가와 멱살을 쥐고 쌈박질을 시작하셨던 거죠. 이 무슨 당혹스러운 일이랍니까. 자고로 세계 시민이라면, 누군가가 지역적 편견에 찌든 발언을 하건 말건 너그러운 포용력을 발휘해서 그러면 안 된다, 타이르면 될 일 아니겠어요. 그러나 당신께서는 소란을 일으킨 죄로 카페 바깥으로 쫓겨나갈 때까지 마음을 풀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음……어떤 손님께서 당신의 고향을 모욕했기 때문에요.
자신이 태어난 나라나 고향에 애착을 드러내는 것을 지탄하신 당신이 이토록 빠르게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더 쉽게 자부심 가득한 세계 시민의 정체성을 내다 버리는 것이 당혹스럽기도 한 한편, 슬며시 웃음이 나는 것까지는 참기 어렵습니다. 뭐, 그렇죠. 사실 이해가 아주 안 가는 것도 아니고요. 사람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래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가슴을 펴고, 또 이렇게 말씀해 주시기를 바라요.
“하지만 그것은 제가 정말 듣기 싫어하는 질문입니다. 출신지가 무슨 상관입니까? 사람을 우편 주소로 판단하는 게 공정한 일입니까?” -19쪽
매사 건승하세요, 코글런 씨. 원래 의지란 건 수도 없이 꺾이는 법이거든요. 누가 꺾기도 하고 나 스스로 꺾기도 하고, 뭐 사는 게 다 그래요. 괜찮습니다. 고향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 잠깐 욱한 거, 못 본 척해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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