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반스, 연애의 기억
다른 곳에서라면 절대로 마주칠 일이 없었을 두 영혼이 우연히도, 운명의 장난처럼 한 곳에서 교차하면서 서로에게 눈길을 빼앗기고 마침내는 마음을 빼앗기는 일련의 과정을 문학적으로 ‘사랑에 빠지다’라고 표현합니다. 안녕하세요, 폴.
다른 이야기에 앞서 잠시 태클부터 걸고넘어지자면, 저는 개인적으로는 그 개념이 매우 낭만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이후에 닥칠 일 따윈 생각하지 않고, 늪인지 호수인지 개울인지 조금도 고민할 것 없이 일단 들어가 보고 나서 판단하자는 그 태도가 참으로 대책 없다고 생각해요.
뭐어… 현실의 낭만 따위 애초에 신문지에 곱게 싸서 내다 버린 사람 같은 말이지만, 낭만을 어디에 올려두고 사는지는 사람마다 다른 법 아니겠어요. 굳이 말하자면 저의 낭만은 다소 돈키호테적인 이상향에 있지, 사람에게 있지는 않아서요. 누군가를 곁에 두고서야 그릴 수 있는 낭만은 사절하는 편입니다. 그 사람이 내가 꿈꾸던 사람이 아닐 확률은, 장담하건대 99.9%에 수렴할 겁니다. 현실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저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얽혀드는 과정이나 그 사랑의 몰락에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본인의 사랑의 역사를 반추하며 당신이 끝까지 품고 간 것이 무엇이었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군요.
서두에 던져진 도발적인 질문을 그냥 지나치고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 있었을까요. 궁금합니다.
사랑을 더 하고 더 괴로워하겠는가, 아니면 사랑을 덜 하고 덜 괴로워하겠는가? 그게 단 하나의 진짜 질문이다,라고 나는, 결국, 생각한다. -13쪽
글쎄요, 당신은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폴이 이 순간 마음의 중력을 잃었겠구나 짐작했어요.
“수전.”
“캐럴라인이 아니라 다행입니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그녀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안다는 듯이 작게 깔깔거렸다. 하지만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24쪽
내가 명명백백하게 말하지 않고 은밀하게 남겨놓은 뉘앙스를 알아차리고 공감해 오는 상대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이해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마음이 불편하고요.
결국 당신과 수전은 누구나 예상하는 그런 관계에 빠져듭니다. 열아홉 살의 패기답게, 당신은 본인의 감정과 사랑에 대단한 확신을 느끼며 관계의 무게나 현실적인 장애는 다소 가볍게 여깁니다. 때로는 주위의 눈총과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 사랑을 일종의 훈장처럼 느끼기도 하죠. 젊은 자신감과 순진함이 필연적으로 가져오게 되어 있는 감정적 파국은 결국 무모한 사랑에 빠져들었던 당신이 거쳐가야 하는 의무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사랑을 향한 내 태도는 독특하게 고지식했다- 사실 독특하게 고지식한 것이 모든 첫사랑의 특징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자, 우리 사이에 사랑의 확실성이 자리 잡았으니, 이제 삶의 나머지가 그것을 둘러싸고 자기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다. 나는 그렇게 될 것이라고 전적으로 확신했다. -66쪽
하지만 내가 돈에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 실제로, 나의 세계관에서, 돈에 상관한다는 것은 의식적으로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을 외면한다는 뜻이었다. “어른이 되려면,” 조운은 말했다. “어른의 일에 관해 생각하기 시작해야 돼. 그 첫 번째가 돈이야.” -130쪽
나중에 이 대화를 생각해 보다가 너는 그녀가 너보다 잃을 게 많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 사실, 처음으로. 훨씬 많다는 사실을. 너는 과거를 버리고 있고, 그 많은 부분은 버리게 되어서 행복하다. 너는 중요한 건 오직 사랑뿐이라고, 그것이 모든 것을 보상해 준다고, 너하고 그녀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갈 거라고 믿었고, 여전히 전과 다름없이 깊게 믿고 있다. -208쪽
이 소설을 읽으며 두 시점이 혼재되어 있음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일인칭으로 사랑의 현재진행형을 살고 있는 폴과, 이 모든 일이 끝나고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상태로 지나간 사랑을 ‘이야기’로서 관조하고 있는 폴이 있죠. 한 사람이며 동시에 두 사람인 폴이 사랑을 바라보는 시선 사이로 흐르는 쓸쓸한 바람이 소슬합니다. 우리는 어딘가에 깊이 감정적으로 매몰되어 있을 때면 상황을 명료하게 읽고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지적인 능력을 일부 상실하게 되나 봐요. 당신 역시도 그런 점을 깊이 느끼고 있는 것 같아서 씁쓸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 이야기의 마지막은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운지요. 종종 이 글들을 쓸 때의 마지막 인사가 찾아지지 않아서 한참을 고민할 때가 있는데 지금도 꼭 그러합니다. 다가올 계절의 바람이 당신에게 너무 차갑지 않기를. 부디 편안한 하루를 보내시길 빕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65985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