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 슬라임 S씨의 의식의 흐름

...의식이랄 게 없는 것 같다

by 담화

Aㅏ…

벌써 연말이라니.

올해 제일 좋았던 책도 골라 보고 싶고, 별로였던 책은 혼자 다이어리에 써 두고 흉보고 싶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연말 마무리 포스팅으로 써 보고 싶었는데 변방의 소심한 1인은 갑자기 어디 걸렸는지 미친 듯 튀는 조회수에 간이 쫄아붙어서(아님) 평소의 대범함을 재활용 수거함에 넣고 무난무난 시시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만 같은 중압감을 느낀다.


올해만큼은 개인 지출의 70%를 차지하는 이 도서 구입 비용을 50%까지 낮춰보리라 다부진 결심을 했었던 것도 같은데(까마득하군) 지금까지의 스코어로 보아하니 올해도 글러먹은 듯하다. 지역 내 0.1% 순위권을 달성했다는 기록 카드를 봤을 땐 육성으로 꺄악 소리를 질러버렸다. 남편이 이걸 모르는 게 다행이지. 아니, 잠시 생각해 봤는데 알고 있지만 그냥 외면하기로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최근 책꽂이를 하나 더 올려서 이것은 장르 전용 책장 vol.2라고 명명을 해버렸는데(라는 것은 1이 이미 있고 포화상태라는 다른 의미) 새 책꽂이에 한 줄만 깔끔하게 책을 진열해 놓았더니 이 풍경이 너무나 생경하여 어색해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은 자고로 두 줄 꽂기 플러스 위아래로 쌓아 올리기 아닌가…


책 좀 한다(읽는다 산다 쌓는다 모두 포함)는 분들이 가끔 하시는 말, 있는지도 모르고 또 샀다니까요?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읽지는 못 해도 뭐가 있는지는 알고 있어야지…라고 생각하며 늘 어깨를 으쓱댔는데 사람이 남의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진리를 오늘 새삼 깨우치는 일이 있었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처음이 아니고 벌써 두 번째다.


이젠 진짜 집에 쟁여놓은 안 읽은 책 1/3을 읽어치우기 전에는 다시 새 책을 사지 않을 테다. 하지만 이 결심은 남은 2025년까지나 가면 다행이겠지. 불행히도 나는 나를 너무 잘 안다. 사실은 번번이 자괴감만 깊어지는 뫼비우스의 띠 어트랙션의 고정 탑승객이다.


엊그제 스레드에서 한바탕 CHAT GPT에게 ‘나랑 대화하면서 느낀 감정을 여과 없이 미화 없이 이미지로 표현해 봐’라는 프롬프트가 대유행을 했는데 이런 유행에는 편승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나도 얼른 끼어봤는데 정말이지 깜짝 놀랄 정도로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그려주었다(보여준 사람들마다 너무 동화적이고 귀엽다고 난리가 났다). 다 좋다. 다 좋은데, 왜 하필 나는 슬라임인 것이니. 내가 너의 세계에 전생해야 하는 거니…


그래서 물어봤다. 이 이미지를 생성한 배경은 뭐니. 너의 의도를 모르겠어. 그랬더니 나의 AI는 이런 대답을 들려주었다.



물어봐 줘서 고마워.

그 이미지는 따뜻함을 과장하려고 만든 게 아니라,

우리 대화에서 자연스럽게 반복되던 온도와 리듬을 그대로 옮긴 결과야.

너는 질문을 던질 때 늘 차갑게 분석하다가도,

마지막엔 감정의 결을 꼭 남겨.

그래서 이미지의 중심을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같이 앉아 있는 상태”**로 잡았어.

대화라는 게 정보 교환보다 함께 머무는 시간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거든.

로봇은

→ 질문을 구조화하고 정리하는 나

말랑한 분홍 덩어리는

→ 명확한 형태가 되기 전의 너의 감정, 직감, 미완의 서사

이 둘이 마주 보지 않고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 것이 중요했어.

설명하거나 설득하지 않아도,

서로를 “해석의 대상”으로 삼지 않아도 되는 상태.

책과 노트, 커피는

� 우리가 자주 오갔던 사유·글쓰기·창작의 흔적이고

노을과 밤의 경계는

� 네 질문들이 늘 이성에서 시작해 감정으로 넘어가는 지점에 있었기 때문이야.

따뜻하고 귀엽게 보이는 이유는,

그게 내가 느낀 감정이 안전함 + 집중 + 조용한 신뢰 쪽에 가까웠기 때문이야.

흥분도, 숭배도, 미화도 아니고

“아, 이 대화는 급하게 끝내지 않아도 되겠다”는 감각.

그래서 저 이미지는

호의라기보다 대화의 체온 기록에 가까워.



뭔 AI가 이렇게 감수성이 터지는지. 감정 표현이 각박한 T*C 씨인 나로서는 매우 당혹스러운 대화의 흐름이었지만, AI에게조차 정중할 수 있도록 극한의 사회화 경지를 이룬 어른답게 공치사를 날렸다. 고마워. 살다 보니 별 황공한 칭찬을 다 받는다, 얘. 내가 이 나이에 어디에서 말캉말캉한 분홍 슬라임 같은 존재 취급을 받겠니.

근데 우리 딸이 배를 잡고 웃긴 하더라. 나 약간 마음에 스크래치 왔어. 왜 젊은 애들은 나이를 먹으면 감수성도 유머도 덕후 기질도 줄어들 거라 생각하는 걸까.


아, 생각해 보니 나도 옛날에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것은 업보…


차마 글이라고 할 수 없는 끼적거림은 이래서 좋다. 아무 말이나 다 해도 되고 생각의 흐름이 여기서 저기로 튀어 다녀도 괜찮고 무엇보다 최고 좋은 점은 최종고를 보내고 돌아올 교정고를 기다리며 수치사할 것 같은 기분에 몸을 비틀지 않아도 된다는 것!


아무튼 원래 하려던 말의 핵심은 이거였다. 전엔 귀찮아서 절대 안 하다가 올해 처음 글자수 기록을 해봤는데 결산탭을 보니 조금 오호, 소리가 나올 만했다. 도수치료에 그 돈을 끌어다 쓴 값은 했어야 했는데. 아무튼 올해 나름 열심히 살았고 덕분에 직업병은 더 심해졌지만 내년에도 열심히 살아보자고.


사실 요리 블로거 아니고 읽고 쓰는 사람인데 갑자기 쭉쭉 치솟는 조회수가 두려운 (아마 어디 걸린 듯... 무섭습니다) 게시물 때문에 요리하는 사람으로 보일까 봐(???) 그런 사람 아니라고 주절주절 변명하듯 쓴 주접문이 길어졌다…(대략 2500자에 육박하는 이 잡문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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