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적으로 훤히 알고 다루는 데 능하여
“아직 일해?”
유진이 퀭해진 눈으로 방을 들여다보는 하진에게 고개를 까딱거려 보였다.
“어... 좀만 더 하면 끝날 것 같아.”
“그래, 그럼 얼른 끝내고 나와. 한 잔 하자- 내가 동업자들도 불렀거든.”
“귀찮은데.”
“그런 소리 하지 말고. 때가 때이니만큼 성찰의 시간을 갖는 것도 괜찮잖아, 동생아.”
“성찰을 빙자한 알콜 섭취의 핑계가 필요한 거겠지...”
“뭐면 어때.”
유진이 알았다며 팔을 설렁설렁 휘저어 하진을 쫓아냈다. 몇 시간째 내리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눈앞이 흐리멍덩해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그건 유진의 개인 사정이었고, 마감은 마감이었다. 유진은 다시 화면을 보며 수정 요구를 받은 일러스트의 사소한 디테일을 고쳐 나갔다.
취미는 열정만으로도 지속이 가능했지만 일은 꼬박꼬박 세금을 걷어갔다. 그러니까, 나라에서 걷어가는 문자 그대로의 세금 말고, 작업에 부가적으로 따라오는 환멸, 스트레스, 허탈함 같은 정서적인 세금. 그 세금을 거뜬히 지불하고도 남는 재력 –남은 열정- 에 따라 일은 그럭저럭 버틸만한 것이 되기도 하고 한때 죽어라 사랑했음에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그 무엇이 되기도 했다. 유진은 사랑과 환멸 가운데서 위태롭게 줄타기를 하는 기분으로 밀린 작업들을 해나갔다. 이러다 소위 번아웃이 오는 건 아닐까 걱정스럽기도 했다.
마지막 색보정 작업을 끝낸 유진이 몸을 뒤로 젖혀 거리를 둔 채 모니터를 가만히 응시했다. 자신의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클라이언트가 원한 방향이 이것이었으므로 이렇게 하는 게 맞았다. 맞는데, 유진의 예술적 심미안은 아니라고 말했다. 이 일을 직업으로 삼았던 초기 이런 어긋난 기분 때문에 힘들었던 때 업계 선배에게 조언을 구했다가 들었던 말은 지금까지도 유진의 기억에 선연히 남아 있었다.
- 유진아, 너 예술하려고 이 직업 택한 거 아니잖아. 네가 추구하고 싶은 것과 자본주의와 어떻게 얼마나 잘 타협할지 너 나름의 공식을 만들어야 돼. 그래야 성공해.
- 성공이라는 건 얼마나 잘 버는 걸 기준으로 말하는 거예요?
선배는 잠깐 입을 다문 채 유진을 쳐다봤다. 그 표정에서 온갖 다채로운 감정을 다 읽어낸 유진이 괜한 질문을 했나 싶어 후회할 무렵 선배가 천천히 대답했다.
- 성공은 액수보다도, 10년 뒤에도 이 업계에서 생존하고 있느냐 아니냐로 판가름하는 거지. 살아남았으면 그게 성공이지, 성공이 뭐 별 거 있나.
- 남이 원하는 수준을 맞춰주는 걸로 돈 버는 게 무슨 보람이 있어요?
- 내가 위로 겸 따끔한 소리 하나 해도 되니?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으로는 겁도 났다.
- 모두가 나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일을 해.
유진이 잠깐 항변하기 위해 입술을 뗐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선배의 말이 맞았다. 하진만 해도 자신이 원하는 식물을 판매하기보다, 고객이 원하는 상품의 구색을 맞추는 일을 훨씬 많이 했다. 옷을 좋아해서 패션 브랜드의 디자이너로 입사한 친구는 자신이 원하는 스타일을 디자인하지 않았다. 다음 시즌에 가장 유행할 것 같은 아이템을, 트렌드 연구소에서 유행할 것이라고 내다본 색상의 제품을 디자인했다. 결국 일의 바운더리만을 정할 수 있을 뿐, 모두가 누군가의 필요를 대신 해결해 주는 일을 하는 셈이었다.
잠잠해진 유진이 자신의 말을 곱씹어보고 있음을 눈치챈 선배가 미소를 지었다.
- 타인의 기준에 최대한 부합하는 결과물을 산출해 주는 게 프로지, 내가 원하는 수준에서 100% 내가 만족한 걸 내놓는 건,
- ...?
- 그건 그냥 재롱이야. 애들이 그러면 귀엽기나 하지.
- 그렇긴 하죠...
한 풀 꺾인 유진이 가만히 대답하자 선배가 위로처럼 말을 건넸다.
- 근데 그게 참 어려워. 그 미묘한 선을 놓고 누군가는 갑질을 하려 들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애들보다 더한 어리광을 부리면서 자신이 제대로 책임감 있게 해내지 않은 걸 의뢰인 탓을 하기도 하거든.
- 어렵네요.
- 어렵지. 진짜 프로페셔널 되기 어려운 세상이야. 그래도 있지,
- 네?
- 가끔 그 태도를 알아보고 진심을 다해 고마워하는 클라이언트들이 희귀해도 있긴 있어. 그런 사람 한 번 만나면 그간 참고 견디면서 이 일 하길 정말 잘했다, 그렇게 된다니까.
잠시 옛 생각으로 빠져들었던 유진이 에이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고 다시 모니터에 시선을 집중했다.
“망할,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는데 그놈의 프로로 살기 더럽게 힘드네.”
걸걸한 소리를 내뱉는 것치고 유진의 얼굴은 제법 밝았다.
[표제어_능통하다/모티브_피터 드러커 「프로페셔널의 조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