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냉장고 앞에서 고민하지

아마도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 같은 깻잎 김치

by 담화

불확실성을 두려워하며 냉장고를 여는 기분이란…….


불확실성이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 혹은 그런 것들의 총체가 아닐까.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쉬지 않고 형태를 바꾸며 변화에 취약한 우리를 압박하는데, 거기에 개인적인 불확실성까지 감당해야 한다면 우리는 그걸 어디까지 버텨낼 수 있을까.

특히 올해는 선이와 진이가 그런 낯선 경험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혼자 버텨내야만 하는 해지. 자취도, 고3 수험생활도 처음 겪는 일일 테니까. 그 루틴이 몸에 익으면 또 그런대로 지속할 만한 것이 되기도 하는데, 익숙해지기까지 몸이, 정신이 감당하는 스트레스의 양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니까.


남들도 다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우리도 참고 견뎌보자. 흠잡을 데 없이 옳은 말인데, 어쩌면 그렇게 겉도는지. 때로는 그런 생각을 해. 말로 하는 위로는 구구절절 옳아서 고개를 끄덕이게 하지만 지나간 뒤엔 이렇게 공허할 수가 없다고. 차라리 손을 한 번 잡아주고 어깨를 도닥여줄 때 전해지는 온기가 낫지 않은가.


엄마는 엄마니까, 엄마의 방식으로 그런 격려를 전하는 게 좋겠지.

한 끼의 식사를 마련하는 게 이렇게 노동집약적이고 허무한 일인 줄 몰랐다고 훌쩍훌쩍 우는 선이에게도, 지독한 스트레스와 면역력 저하로 입맛을 잃고 체력 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진이에게도 효과가 있을 방식으로.

사실 반쯤은 뿌듯하고 대견한(여기서의 포인트-내가 이렇게 좋은 엄마라니까, 하는 셀프 대견함이라는 황당한 사실) 기분으로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바로 그 불확실성이 순간 머리를 때리는 거야. 그 순간에 또다시 그 녀석이 찾아와. 너희가 잘 먹어줄 거라고 생각했던 이 음식이, 사실은 그냥 내가 먹고 싶었던 거 아닌가? 그런 회의감. 지금 뭣에도 식욕이 전혀 돌지 않는다는데 이건 잘 먹어준다는 보장이 대체 어디 있다고? 그렇지만 이런저런 골똘한 고민 역시 아무런 답을 주지 않는다는 것 하나는 확실하지. 그러니 어쩌겠어, 뭐가 됐든 그냥 칼을 쥘 수밖에 없는 거야. 그래, 잘 벼린 칼을 쥐었는데 경력이 울겠다. 무라도 썰어야지.

고민하다가 조금(과연) 묵은 사과를 하나 꺼냈어. 껍질을 벗기고 조각을 내서 블렌더에 툭툭 던져 넣고, 양파도 하나 깠어. 양파도 같은 운명의 길을 갔지. 유유상종은 이럴 때도 얼마나 잘 어울리는 말인지. 어울리는 친구가 비슷하면 가는 길도 비슷해. 그다음으로 이 운명의 소용돌이에 함께 할 파티를 찾는 건 일도 아니었어. 마늘, 홍고추, 까나리액젓, 아주 약간의 수분, 동강 난 무 조각들. 그렇게 혼연일체가 되라고 펄스 버튼을 누르면서 여기에 버무리면 좋을 채소를 생각했지. 마침 냉장고엔 알배기 배추가 하나 들어 있었고 깻잎찜을 만들까 해서 대량으로 쟁여놓았던 깻잎이 있었지. 그래, 너 당첨.

깻잎을 쥐고 앞뒤로 깨끗이 씻어서 채반에 널어 말리는 동안 겉절이 양념은 저희끼리 한숨 푹 자라고 재워뒀어. 그리고 한 30분쯤 지났을까.

깻잎을 두어 장씩 쥐고 양념을 반 스푼씩 발라서 유리그릇 안에 차곡차곡 쌓았지.

살림살이를 도맡은 초년생 시절엔 이런 것조차 그램 단위로 누가 설명해 주기를 바랐던 기억이 나더라. 그런 시절이 있었으니 깻잎 두 장마다 티스푼 (혹은 테이블 스푼) 얼마씩 얹어서 골고루 펴 바르고 차곡차곡 쌓아서 익혀주면 돼, 누가 이렇게 이야기해 주는 게 얼마나 구세주처럼 느껴지는지 엄마도 모르지는 않는데, 사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세상에 뭐 얼마나 되겠어. 그냥 적당히, 대강 바르고 넘기고 바르고 넘기고 다 그렇게 한단 말이야. 그래도 잘만 맛있게 익더라, 뭐.


깻잎이나 미나리 같은 향신채를, 한국 사람이어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걸 엄마는 어른이 된 뒤에야 알았어.

향신채를 너무나 좋아하는 엄마는 아니 그걸 대체 왜 싫어하지 싶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곤 했지만 뭐, 이젠 그냥 담백하게 인정하게 됐어. 그래, 사람 입맛이 어떻게 다 같아. 그래도 소심하게 주장은 해 볼래. 깻잎 김치 정도는, 그래도 호불호 덜 갈리는 음식 아니야? 그러니까 잘 먹어 줄래, 까다로운 아가씨들? (막내를 따로 호명하지 않은 건, 네가 깻잎 너무 좋아하는 거 알아서 그래. 너무 서운해하지 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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