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풀이엽편 | 집요하다

끈질기게 매달려서 생각하고 또 애쓰고

by 담화

“완벽한 구현이란 게, 세상에 있긴 할까?”


악보가 뚫어져라 음표를 들여다보며 연신 책상을 톡톡 두들기던 니나가 생뚱맞은 소리를 했다.


“이번엔 또 무슨 철학적인 논제를 던지시려고?”


맞은편에 앉아 같은 곡의 다른 악보를 읽고 있던 파랑이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니나에게 붙잡힌 지 두 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니나는 전혀 놓아줄 기세가 아니었다. 본인은 궁금해 미칠 지경인 이슈가 또 생긴 모양이었다. 하는 수 없지, 하고 반쯤 포기한 파랑이 결국 경청할 자세를 취했다.

학문적인 호기심이 잔뜩 묻은 푸른 눈이 장난스레 반짝이는 동시에 반달 같은 호를 그렸다. 아마 니나 자신도 자신의 과한 이야기를 받아주는 사람이 흔치 않다는 사실 쯤은 자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있잖아, 이 악보만 해도 그래. 작곡가가 이 곡을 쓸 때 분명 이런저런 심상 스케치를 가지고 있었을 거거든. 있었을 거야, 분명히. 이야기에만 기승전결이 있는 게 아니잖아. 보여주고 싶은 풍경이 있었을 거고 그 장면 속에 서사가 있었을 거야. 오선의 설계도에 그걸 제아무리 성실하게 옮겼다고 해도, 그게 리스트의 마음속에 있었던 걸 그대로 표현한 건 아닐 거란 말이지.”


좋게 말해 실로 학구적인 태도였다. 그리고 그건 윤파랑에게 가장 부족한 자질이었다.

지난 공연을 한 번 함께 했던 이후로 제법 친해진 까닭에 니나와 파랑은 종종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종종 나누는 때가 잦았다. 그렇다곤 해도 매번 화제가 이렇게까지 아카데믹해지는 건 아마도 뭐든 끈질기게 파고드는 걸 좋아하는 니나의 성미 탓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 그렇겠지만…”

“어느 정도는 포기하는 마음도 있지 않았을까? 이 이상은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 100% 만족할 수는 없어도, 이게 한계다. 어쩌면, 글쎄 모르겠다. 리스트 정도로 쇼맨쉽이 있는 사람이었으면 역시 난 천재인가 봐 했을지도 모르겠긴 한데… 그래도 분명 어딘가 아쉽지 않았을까. 아쉬우면서도 그대로 세상에 발표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란 게 예술가들한테는 있잖아.”


재잘재잘 떠드는 니나의 말을 듣다 문득 요즘의 아이돌 스타 저리 가라 할 수준으로 팬들을 몰고 다녔던 리스트의 초상을 떠올렸던 파랑은 피식 웃고 말았다.


“네 말은 결국 적당히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다는 소리야?”

“아니지. 그게 아니야. 음… 나나 너나 연주자니까, 솔직히 작곡가의 마음을 어떻게 다 상상해 보겠어. 하지만 다만 그런 생각은 해. 내가 미처 다 이곳에 옮겨 놓지 못한, 내가 써내지 못한 것까지 읽어내서 표현해 주는 연주자가 어딘가 있지 않을까. 나타나주지 않을까, 그런 미련이 계속 생길 것 같아.”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초조해서 죽을 수도 없겠는걸.”


대화를 적당히 끊고 싶어 하는 파랑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니나가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휙휙 가로저었다.


“아, 좀, 어깃장 놓지 말고. 그런 게 아니라 내 말은 순수한 완벽이라는 게 현실에 존재할 수 있는 개념이냐는 거지. 그런 거 궁금하지 않아?”

“궁금하긴 한데 내 머리는 지금 안 돌아가. 경청만 할게. 계속하시죠, 선생님.”

“한편으로는, 이래. 작곡가가 곡을 완성했을 때 자기가 분명히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연주가 있었을 거라고. 악보에는 피아니시모라고 적을 수밖에 없었어도, 그렇게 적어 내려 가던 순간 리스트 머릿속에 있던 피아니시모가 과연 어느 정도의 볼륨이었을까? 연주자 한 사람이 그 피아니시모의 음량을 결정하는 데 더 크게 관여한 건 어느 쪽일까? 느낌일까, 학술적인 해석일까?”

“머리 아파, 니나.”

“한심해, 파랑. 공부하러 이 멀리까지 왔으면서 그런 걸로 머리 아프다는 소리나 하고. 실망이야.”

“아… 맘대로 기대하고 맘대로 실망하지 말아 줘, 듣는 사람은 상처받는다고.”


순간 니나가 손가락을 딱 튕기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니까, 그거라고! 기대치. 기대치는 마음속에,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거잖아. 내가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기대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가능한가, 나는 그게 궁금하다고! 이미 어떤 발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그 발상을 표현으로 옮기는 순간 그 완벽한 심상 스케치에서 20% 정도는 뭔가가 유실이 될 거란 말야. 그런데 심지어 그걸 감상하거나, 재현하는 입장이 되면 또 20% 정도는 전달되지 않고 그냥 사라져 버릴 게 분명하단 말이지.”

“어, 그렇다 치고.”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게 뭔지 알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아쉬운, 불완전한 재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종종 비슷한 감정을 느껴. 유사한 감동을 받는다고. 너는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해?”

“미하일로바 선생님은 답을 갖고 계신가 보군요.”


다소 빈정거리는 말투에도 니나는 개의치 않고 자신감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 단어를 입에 담았다. 그 말을 들은 파랑의 고개가 슬쩍 기울어졌다.




[표제어_집요하다/모티브_Liszt「La Campanella」]

사진: UnsplashMarius Masalar



+ 개인적인 사정으로 지난 금요일 업로드를 밀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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