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고들어 공부하고 연구하고 또 매달리고
['집요하다' 편에서 계속]
“동의하는 얼굴이 아닌데.”
니나가 아랫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러나 어딜 봐도 그런 척하는 얼굴이었지 정말로 토라졌다든가 샐쭉해진 것은 아니었다. 파랑은 삐친 척하는 여동생에게 수없이 당해본 경험으로 그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았다.
“부분적으로는 동의해. 그런데 궁금하긴 하다. 왜 그런 결론을 내린 건지.”
“어, 그건.”
보면대에 펼쳐진 악보 위에 늘어선 음표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소녀가 활 끝으로 그것을 톡톡 쳤다.
“한 사람의 예술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어떤 주제가 있다고 해봐. 주제여도 좋고, 심상이어도 좋고, 벼락처럼 떨어진 영감 한 조각이어도 좋아. 하지만 그걸 담아낼 적절한 그릇이 없는데 어떻게 보여주지? 여기에 이렇게 기막히게 아름다운 게 있다고 누구에게든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걸 보여주든 들려주든, 상대가 인지하게 할 방법이 있어야 할 거 아냐.”
“아.”
니나가 하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대강 감을 잡은 파랑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러나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의 흐름을 탄 니나는 대강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이디어는 절반이야. 아니, 절반보다는 조금 더 지분이 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디어가 얼마나 빛나든, 그것만큼 중요한 게 형식이라고. 형식이 구조를 만들어. 예술의 방식을 정의하지. 형식 자체가 미학적 가치에, 예술적 주제에, 느낌과 정서에 공헌한다고.”
“어, 그렇... 지.”
“그런데 지금은 어때? 심지어 형식보다도 느낌의 전달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들 하지. 경계를 허문다, 좋아. 괜찮아. 하지만 경계 자체가 이미 흐릿할 때는 어쩌지? 예술의 각을 잡아주는 것이 바로 그 형식미의 존재 이유인데.”
“하지만 틀로서의 형식은 너무 갑갑해.”
“형식을 프레임으로 인식해서 그런 거 아닐까? 나는 예술의 형식이란 건 바깥에서 옥죄는 프레임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보다는 골조에 가깝다고 봐.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내가 재현할 수 있는 범위가 달라진다고 생각해.”
니나의 손이 빠르게 두 번 움직였다. 한 번은 바깥에서 안쪽을 향해 내리누르는 방향으로, 두 번째는 안쪽에서 뭔가를 꼬집듯 움직이며 바깥쪽으로 뻗어나가는 방향으로. 파랑은 불현듯 떠오른 궁금증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대로 뱉어냈다.
“왜 재현이라고 해? 예술은 창조적인 쪽에 가깝지 않나.”
“아아니. 나는 모든 예술은 재현이라고 생각해. 위대한 자연을 어떻게든 모사하고 재현하려는 하찮고 사랑스러운 노력이지.”
“너, 평소에도 항상 이런 생각을 해?”
반쯤 질리고, 나머지 반쯤은 감탄한 채 파랑이 반문했다.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살래살래 젓는 니나의 목덜미에서 밝은 금발이 물결쳤다.
“항상은 아닌데, 응. 좀 많이. 이왕 얘기 꺼낸 김에 좀 더 물어볼게. 느낌을 표현하고 전달한다는 거,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측정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그냥 개인에게 속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 그런 두루뭉술한 개념이 여기저기서 사랑받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모르겠는데.”
별로 궁금하지 않은데, 궁금해해야 돼? 라는 질문은 가까스로 넣어두었다. 그 말을 했다가는 한 시간은 족히 더 잡혀있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한 탓이었다.
“난 알 것 같아.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렇지 않을까 추측하는 것뿐이지만. 음악을 아웃소싱해서 그런 거 아닐까.”
“아웃소싱이라니...”
음악원의 연습실과는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낯선 표현에 파랑이 뭉그적거리며 대답을 회피했다. 니나의 입가에 동의를 구하는 미소가 옅게 떠올랐다. 연습실 창가 밖으로 앉아 있던 낙엽들이 세찬 가을바람에 일제히 구르기 시작했다.
“19세기로 넘어오면서 음악은 예전처럼 직접 누리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지. 스스로 악기에 손을 올리기보다 누군가가 연주하는 것을 감상하고 거기에 말을 보태는 것이 주류가 됐어. 당연하게도 스스로 음악을 연주하면서 몸에 익혀왔던 구두법, 음악적 통사론 같은 건 이제 더 이상 자연스럽게 녹아들지 않게 된 거겠지.”
“그게, 네가 추구하는 음악이야? 느낌보다는 형식에 방점을 찍는 거?”
“꼭 그렇다기보다는... 늘 아쉬웠거든. 노력을 들여 공부해야 알 수 있는 구조적인 아름다움이 갈수록 기피 대상이 되어가는 거. 내가 이런 이야기까지 하는 거 진짜 처음이다. 보통은 중간에 말 돌리거나 다들 어떻게든 핑계 대고 도망가는데.”
“나중에 커피 사.”
소녀가 피식 웃었다.
“근데 내가 왜 너한테 이런 얘길 굳이 했는지 알아?”
“도망 못 가고 울면서 다 들어줄 거라고 생각해서 한 거 아니야?”
“그것도 맞는데, 너는 나하고 반대로 생각하니까. 내가 형식주의자라면 너는 그야말로 인상주의의 계승자 같거든.”
순간 말문이 막힌 파랑이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러면 내가 네 말에 계속 반대했으면 어쩔 거였는데?”
내내 웃고 있던 니나가 눈썹을 치뜨며 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황당하게 되물었다.
“아니, 나랑 생각이 똑같은 사람하고 뭐 하러 이런 얘기를 해? 서로 역시 우리가 맞아, 다른 애들은 다 틀렸어, 바보 같아. 이러면서, 그... 뭐라더라. 이런 데 쓰는 말 있었는데.”
“확증 편향?”
“어, 그래. 그거. 내 말이 무조건적으로 맞다고 해 주는 사람이 필요하면 엄마한테 얘기하는 게 제일 빠른 거 아냐?”
[표제어_학구적인/모티브_오카다 아케오 「음악을 듣는 법」]
사진: Unsplash의Dawid Zawił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