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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Jan 31. 2024

그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겠지만

대니 샤피로, 계속 쓰기 : 나의 단어로

첫 자소를 입력하기에 앞서 고민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글을 시작하는 걸까.


내 경우에는 이렇다. 특별한 방식을 쓸 때를 제외하곤 대개 두 가지 방식 중의 하나다. 바깥에서 대강의 분량과 틀을 잡아놓고 완성본을 대강 떠올리면서 쓴다. 조각과 비슷한 느낌인데, 학부생일 때 수없이 많이 했던 작업들은 대개 이런 방식을 취했다. 머릿속에 있는 아이디어 스케치와 최대한 비슷하게 모양을 다듬어나가는 형식이다. 그래서 미리 생각을 충분히 많이 해 둬야 하지만 대신 쓸 때는 금세 쓸 수 있다. 구상이 다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소조와 흡사한 과정을 밟아나가는 스타일로 쓸 때도 있다. 물론 소조라고 해서 막무가내로 작업할 리는 없다. 굳이 표현하자만 그렇다는 것이지 실상 문장 하나를 쓰고 그다음 문장을 끌어내고 얼기설기 엮어가는 것과 더 유사하달까. 그런데 더 웃긴 건 이렇게 쓴 글이 오히려 어떤 구체적인 포맷과 기승전결(...)을 생각하고 쓴 것보다 훨씬 괜찮을 때가 많다. 천성이 제멋대로인 인간이어서 그런 건 아닐까 약간 자조하고 있다. 


취미생활 중의 하나인데, 나는 글쓰기에 관해 쓴 책들을 읽는 것을 몹시 좋아한다. 아주 클래식한 글쓰기 책, 예를 들면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 윌리엄 스트렁크의 「영어 글쓰기의 기본」과 같은 책부터 에세이인 조지 오웰의「나는 왜 쓰는가」와 결이 유사한 책들, 좀 더 실용적인 작법서에 가까운 로버트 맥키의 저서들, 리사 크론의 저서들... 심지어는 「미스터리를 쓰는 방법」, 「장르 작가를 위한 과학 가이드」 같은 책들도. 이런 목록을 줄줄이 주워섬기는 이유는, 정말로 이게 '취미의 영역'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놀기 위한 목적이 아니면 이렇게 미쳐서 읽기도 쉽지 않다... 이쯤 오면 이게 다 밑밥임이 드러났을 테니 적당히 부스럭부스럭 껍질을 벗겨 보자면,


계속 쓰기: 나의 단어로 | 저자 대니 샤피로 | 출판 마티 | 발매 2022.03.21.


이 책 이야기를 하려고 그랬다.


침대에서 빠져나올 때 한 발을 다른 발보다 먼저 바닥에 내려놓는 것처럼, 이를 닦고, 얼굴에 물을 끼얹고, 동물이나 아이가 있다면 끼니를 챙겨주고, 원두 무게를 재고, 주전자를 올려놓는 것처럼 우리는 글을 쓸 때 한 번에 한 단계씩 접근해야 한다. 처음부터 세계 전체를 떠올릴 수는 없지만, 보도의 갈라진 틈이나 까진 구두뒤축을 묘사하는 건 가능하다. 그리고 갈라진 보도나 까진 구두뒤축은 빛의 핀홀처럼 이야기에, 인물에, 우주에 진입하는 지점이 될 수 있다. -30쪽


책을 읽는다는 건 동지애의 발현이기도 하다. 독서는 도전이고, 위안이고, 신호등이다. "책 읽으며 보내는 하루를 누가 좋다고 하겠어요?" 애니 딜러드가 말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보내는 인생이란 좋은 인생이죠." -55쪽


당신의 언어는 어떤 악기를 불러내는가? 첼로? 전자기타? 오보에? 당신은 협주곡을 쓰고 있나? 아니면 교향곡을? 자장가를? 귀를 기울이면 당신 자신의 목소리 리듬이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113쪽


네 자신이나 네 작품을 믿고 말고 할 것도 없어. 네게 동기를 부여하는 욕구들을 직접적으로 인지해야 하고 열려 있어야 해. 채널을 열어두도록 해. 마냥 즐겁기만 한 예술가는 없어. 어느 때고 무엇에건 만족할 일은 없어. 그저 이상하고 신성한 불만족만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뿐이야. 다른 이들보다 더욱 살아 있게 해주는 축복받은 불안만이 있을 뿐이야. -167쪽


픽션이 아니므로, 제목이 스포일러라는 표현은 온당치 않겠지만 정말로 그러하다. 한 줄의 제목이 내용을 압축하고 있는 책이다. 그러나 아하 그렇구나, 하고 이 책을 스쳐 지나가는 것은 감독의 의도와 곳곳에 숨겨진 수많은 의미의 결이 담긴 보물 같은 영화를 2배속에 한꺼번에 뭉뚱그려 재생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 될 것이다. 모두가 자신을 저자로 새긴 책 한 권을 내고 싶어서 안달복달하는 시대가 아닌가. 


적어도 쓰는 일에 대해 아주 최소한의 경의를 잊지 않기를, 그러한 마음의 표현으로 적어도 먼저 그 길을 갔던 선배들의 글을 겸허히 읽는 일만큼은 소홀히 하지 않기를. 늘 타인의 언어에 빚지고 있음으로 나의 언어도 태어날 수 있었음을 잊지 말기를. 

쓰는 사람의 기도문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런 것들을 적어 넣고 싶다. 스스로를 위안하는 말만큼이나 감사하는 말들로, 나태해지지 않기를 다짐하는 말들로, 서로의 어려움을 공감하는 말들로. 


쓰기에 관한 많은 책들이 '어떻게' 쓰는가를 주로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은 '지속적으로 쓰고 또 쓰는', 때로는 자괴감에 젖어서도 '홀로 어떻게든 헤쳐 나와야 또 계속 쓸 수 있는 삶'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작가의 숙명적 고독에 대해서도 지극히 건조하고 또 자세하게. 

정말로 쓰고 싶은 사람은 무엇을 쓸까 먼저 고민하기보다, 일단은 펜을 들고 키보드에 손을 올리겠지. 이미 너무 많은 말들이 넘쳐흐르고 있지 않겠는가. 그러다 문득 도대체 쓴다는 게 뭔지,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지는 순간에 이 책을 펼쳐보기를 권한다. 대니 샤피로가 계속 쓴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 소탈하게 이야기해 줄 테니까. 


다만 나의 언어가 나의 곡괭이이기 때문이고, 나는 이 도구로 아직도 알아야 할 것들의 거친 표면을, 그것이 무엇이건, 조금씩 깎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190쪽


최초작성_2024.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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