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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Feb 12. 2024

각자의 SF, 각자의 내비게이션

조애나 러스, SF는 어떻게 여자들의 놀이터가 되었나

사람마다 특이한 독서 습관 한둘쯤은 있다. 내 습관은 특이의 범주에 들어갈 정도로 유별난 것 같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이렇게 책 읽는 사람들이 다 이런 습관을 갖고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나는 한 번에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다. 하루에 30~40페이지씩 적게는 서너 권, 심할 때는 대여섯 권을 나눠서 이것을 읽다 저것을 읽다 하곤 하는데 특히 한 권의 책에서 지루한 대목을 만났을 때 하품하기 시작하는 머리를 깨우는 데는 굉장히 효과가 좋다.      

그런 특수한 처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완독이 어려웠던 책이 하나 있었다. 중간에서 아예 읽기를 포기했었다가, 어쩐지 내가 읽지 않고 못 본 척한 나머지 반 권에 뭔가 재미난 글이 남아있을 것만 같은 불확실한 기대가 계속 마음을 간질이는 바람에 결국은 울며 겨자 먹는 기분으로 간신히 읽었다. 결론적으로는 잘 읽었구나 싶었지만,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비슷하게 전하는 좋은 책들이 최근에 더 많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덧붙여 두고 싶다(이 책에 실린 글들이 쓰여진 연대가 1970~1980년대다.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 이야기가 제법 있어서).     


딜레이니는 여기서 SF는 미래 예측이라는 통념을 넘어섰다. 그의 정의가 더 유용한 이유는 저자의 의도나 과학적 정확성을 평가하는 데 의존하지 않고도 판타지와 SF를 구별하는 방법을 알아냈다는 데 있다.
위 기술에 따르면 판타지는 ‘부정적 가정’을 형상화한다. 다시 말해 판타지가 판타지인 이유는 현실을 위반하고 어긴다는 데 있다. 현실 세계는 판타지 속에 줄곧 부정으로 내포되어 있는 셈이다. 딜레이니의 말에 따르면 판타지는 일어날 수 없었던 일, 즉 일어날 리 없고, 존재할 리 없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이 부정적 가정, 즉 일어날 리 없거나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을 가정하는 것이 실은 판타지에서 느끼는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말하려 한다. 판타지는 현실을 위반하고 어기고 부정하며, 이 부정을 시종일관 고수한다. 
하지만 SF는 일어나지 않은 일에 관한 글이다. SF가 한편으로는 현실과, 또 한편으로는 가능성과 맺고 있는 관계를 살펴보는 것은 SF에서 느끼는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다. -p.55     


이 대목을 읽은 순간 왜 환상문학도 좋아하면서 SF를 좋아하는 독자는 있어도, SF는 읽어도 판타지는 도무지 수용하지 못하는 독자가 있는지를 단숨에 이해하게 되었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스스로 설명할 수 없었던 현상을 명쾌하게 설명하는 말을 만날 때의 상쾌함이란(물론 그것이 100% 진실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들로부터 더 좋은 해석이 태어나는 법이므로).      


중독의 예술은 필연적으로 나쁜 예술이거나 적어도 절반은 나쁜 예술일 수밖에 없다. 모험과 특수 효과에 집중하려면 정치, 경제, 역사는 물론 인간의 성격과 도덕상, 인간관계를 단순화해야 한다. 그러나 드라마는 –그리고 소설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을 담는 예술이다. 정치, 경제, 역사, 인간의 성격, 도덕성, 인간관계를 뺀 소설은 소설이 아닌 셈이다. -p.86     


공포소설은 극단적 상태의 소설입니다. 그리고 공포소설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누군가 여기까지 와 본 적이 있으며, 넌 혼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파괴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것들, 섬뜩하고 악마적인 것들을 한사코 부정하는 문화에서 자라난 사람에게는 위로가 되는 중요한 메시지죠. -p.154     


호러를 좋아하지 않지만, 이 장르 역시 누군가에게 불가해한 세계에 대한 이해의 틀을 제공하고자 하는 의도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왜인지 위로를 받았다. 나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어떤 불안함, 공포감 역시 누군가는 알고 있고 체험해 본 적 있다는, 일종의 공감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면 더 이상 무섭지가 않은 것이다. 작가들이란, 그중에서도 특히 현실에 잇닿게끔 개연성을 부어 넣으며 누군가에게 이런 감정, 나도 알고 있다며 이야기란 직물을 짜는 이들은 얼마나 다정한 사람들인지.      



내가 걸어온 SF의 복도를 돌이켜보면 제일 첫 번째 자리엔 정신세계사에서 나왔던 「신들의 사회」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프랑켄슈타인」을 SF의 효시로 꼽지만 글쎄, 내게 SF란 무엇보다도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어라, 이거 좀 말이 되네’라는 내적 끄덕임을 끌어내는 아이디어를 품고 있어서 어쩐지 현실성이 좀 느껴지는, 그런 장르였다. 


내게 SF의 장르적 틀을 만들어 준 장인은 로저 젤라즈니였으나 이거 좀 멋있다, 내가 탐험할 수 있는 만큼 이 세계를 탐험하고 싶다는 마음을 끌어올렸던 최초의 작품은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였다. 이 작품의 어디가 SF적이었냐고 한다면, 그야 당연히 ‘저런 세상이 정말로 오긴 올까’ 싶은 궁금증을 잔뜩 불어넣었으므로. 물론 그다음 주자는 이미 나를 실제로 아는 사람들은 질릴 만큼 들은 「은하영웅전설」이었고. 


SF가 뭔지도 모르면서 SF의 멋짐에 홀리기 시작했던 틴에이저는 순식간에 그다지 되고 싶은 적 없던 어른이 되었는데, 어느 날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국내 SF 작가들의 약진이 눈부셨다더라. 세상에 이게 웬 떡인지. 

스페이스 오페라적인 이야기가 SF적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을 넘어 어딘가 geek 한 아이디어가 있는 ‘진짜 이런 일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싶은 미시적인 SF의 세계에 도달해 있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드는 때에 SF가 막 개화하기 시작한 시기에 쓰여진 칼럼을 읽는 것은 새삼스러운 재미가 있다. 더불어 작가가 활발히 글을 쓰던 그 시기에 비해 아마도 조금은 나아졌을 지금 역시 70-80년대에 쓰여졌던 이런 칼럼들에게 빚지고 있음을 새삼 자각하게 되기도 하고.


Long live science fiction, or speculative fiction, whatever you are, whoever you are, wherever you are. 


2024.2.12 최초작성


덧.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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