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풀이엽편 | 켜켜이

틈과 결 사이로 스며들며

by 담화

“......”


나는 뜨악한 얼굴로 폰을 내려다봤다. 맨날 나 바빠,를 시전하시는 공사다망하신 오빠가 웬일이실까.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피아노 위로 옮겨준 사랑이를 한 번 쳐다보고 웃음이 나오는 걸 삼켰다.


“네, 귀하신 분께서 어인 일로 이 누추한 누이에게 영상통화를 다 걸어오시고, 어디 아프신가?”


누가 음악하는 사람 아니랄까 봐, 학교에서 듣는 것보다 몇 배는 고상하게 들리는 소리로 웃기부터 한 오빠가 인사말을 건넸다.


“잘 있었어, 윤해랑?”

“엄마한테는 전화 걸고 나한테 거는 거?”

“아, 걸어야지. 근데 좀 너한테 급하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흐음.

내가 눈을 가늘게 쭉 늘인 채로 사랑이의 리본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렸다. 해도 바뀌었는데 좀 새로운 디자인으로 바꿔줄 때도 되었다는 생각을 하느라 오빠가 하는 말을 놓치고 말았다.


“미안. 못 들었다. 다시 말해주라.”

“...한테 선물할 만한 거, 뭐가 좋은지 추천 좀 해달라고.”


오호라. 나는 대뜸 문 바깥에 대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엄마아아아아―! 어머니의 잘난 아들이 저 먼 이역만리까지 가서 하라는 음악 공부는 안 하고 말입니다아아― 엄마! 모친! 듣고 계십니까아-”


내가 기대한 딱 그대로의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스피커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아니 아니, 그런 거 아니야! 해랑아, 윤해랑! 잠깐만!!”


나는 느물느물 웃으며 마치 그렇게 하면 나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손을 쭉 뻗은 모습의 화면 속 오빠의 모습을 즐겼다. 와, 이거 진짜 월척이네. 그런 게 아니긴 뭐가 아니야, 완전 딱 맞구만 뭘. 배를 붙잡고 뒤로 넘어갈 지경이 된 내가 폭발적인 웃음과 사례가 섞인 괴상한 소리로 숨김없이 기분을 충분히 표현한 다음 시침을 뚝 떼었다.


“어때? 내 연기 쓸만하지?”

“... 엄마 집에 안 계셔?”

“응. 엄마 요즘 통장 일 해서 되게 바빠.”


히죽거리는 내 얼굴이 희미하게 비치는 화면 안의 오빠는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저런. 별로 대단한 외모는 아니어도 그나마 빛이 나는 건 그 결 좋은 머리카락에 힘입은 바가 클 텐데, 그걸 저렇게 줘 뜯으면 어떻게 하나. 일단 좀 달래줘야겠다.


“알겠어, 근데 진짜 거기까지 가서 공부는 안 하고 연애만 하는 건 아니지?”

“너한테 도대체 내가 뭐 하는 인간으로 보이는 건지 모르겠다. 잠깐만, 근데 그거 아니라니까? 친구야, 친구!”

“친구면 뭐 대강 알아서 했을걸. 나한테 영통까지 걸면서 물어봤겠어?”

“미치겠네, 사람 말을 왜 안 믿냐...”

“믿게 행동을 하시든가요.”


내가 웃음을 삼킨 채 가만히 오빠의 얼굴을 봤다. 오빠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기 위해 가족을 떠난 지가 올해로 벌써 3년째였다. 오빠는 오빠의 시간을, 나는 나의 시간을 살고 있다. 대략 900여 일, 우리에게 각자 다르게 쌓인 시간들. 시간은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시간의 겹과 결 아래 품은 것들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그 시간 동안 오빠의 살아온 모습은 어땠을까. 시간의 층마다 쌓인 것 중에서 가장 두꺼운 것은 무엇일까. 역시 어떤 종류의 배움과 깨달음일까, 아니면?


“해랑아, 너 요즘도 피아노 쳐?”


갑자기 뭔 딴소리야. 말을 돌리려고 저러나. 나는 폰을 살짝 들어 올려 내 방에 자리한 지 오래인 오빠의 업라이트를 보여주었다.


“애인한테 버림받아 홀로 남아 슬퍼하다가 이렇게 새 파트너 만나서 잘 살고 있습니다만.”

“너 피아노 치는 거 듣고 싶다. 얼마나 늘었나 궁금하네.”

“아무래도 오빠 지난번에 한국 왔었을 때보단 조금은 늘지 않았을까. 그래도 뭐, 전공생이 보기엔 저게 뭔가 싶겠지만. 오빠는? 요즘 뭐 연습해?”

“아, 얼마 전까지는 베토벤. 소나타 연습하지, 지금은.”

“오, 몇 번?”

“30번.”


우리는 지금 무엇what을 묻고 있다. 한 뿌리에서 자랐어도 각자의 삶을 살기 위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지를 뻗는다. 그렇지만 가끔은 궁금하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 내가 보지 못한 어떤 풍경과 사물을 보았는지 들려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같은 것을 보고 겪었던 시절이 있었어도, 그 같은 경험 안에서도 우리는 조금씩 다른 것을 보고 느꼈다는 사실을 지금은 안다. 그래서, 오빠한테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는 거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친구고 뭐고 세상 사람에게 관심이 일절 없던 오빠가, 그 윤파랑이 무슨 사연으로.


“피아노 소나타고 뭐고 됐으니까 빨리 불어.”

“뭘 불어, 풍선도 아닌데.”

“아, 썰렁해! 재미없으니까 빨리 말해.”

“일단 니가 생각하는 거 절대 아니니까 머릿속으로 이상한 시나리오 쓰지 말고.”

“어차피 오빠가 그런 주변머리 있다고 생각도 안 하거든.”


나는 그냥 궁금한 거다.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우리 오빠가 가족 말고 다른 사람의 생일까지 챙길 정도로 인간에게 관심이 생긴 건지. 이런저런 일들과 사건들도 궁금하지만 그 틈바구니에 쏙쏙 들어찬 오빠의 감정들이 너무나 알고 싶다. 내가 모르는 일들 사이에 스며든 어떤 감정들이 내가 알던 모습에서 지금의 모습으로 바꾸어 놓은 걸까. 시간의 틈바구니에, 마음의 결들 사이에 한 사람의 성격을 달라지게 할 만한 이유로 끼어들 만한 것들을 생각하며 나는 어안이 벙벙해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평면의 오빠를 보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런 대박 사건은 본인을 족치면서 들어야 제맛인데.”





[표제어_켜켜이/모티브_안토니오 다마지오 「느끼고 아는 존재」]

사진: UnsplashAdrien Conver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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