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 틈, 짬, 여유...
“아, 클났네. 어떡하지.”
윤수는 잊을 만하면 울리는 스마트폰의 알람을 볼 때마다 진땀을 흘렸다. 윤수가 주기적으로 올리는 2차 창작 연재물의 다음 회차를 재촉하는 짧은 한두 마디의 댓글 알람이 울릴 때마다 심장이 덜컹거렸다. 약속인데. 약속했으니까 올려야 하는데, 비축분은 바닥을 보인 지 오래였다. 그렇다고 구구절절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글 쓸 시간이 없었다, 다음 주엔 꼭 약속을 지키겠다고 변명하는 것도 성미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바빴는데. 갑자기 폭우처럼 쏟아져 내린 수행을 감당하는 것도 충분히 버거웠다. 수업 시간에 수면 부족 때문에 고개를 뚝뚝 떨구어 가며 졸더라도 잠자는 시간을 쪼개어 가며 열심히 글을 썼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건 내 사정이고. 윤수가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이제 겨우 고등학생이었어도 윤수는 자기가 발을 들인 일에서만큼은 프로처럼 행동하려 애썼다. 비록 그것이 어쩌다 날아드는 후원 쿠폰 외에는 아무런 금전적 이득을 가져다주지 않는 일이었어도 언젠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의 기반을 만드는 과정이라 생각했기에 조금도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을 쪼개어 가며 나름의 직업정신(?)을 발휘해 가며 아마추어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굳건히 유지하고 있던 윤수였기에, 간혹 어딘가에서 듣게 되는 요즘 애들은 의욕도 없고 어쩌고 저쩌고,를 들을 때마다 이 이상 어떻게 열심히 살라는 거냐고 반문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눌러야 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이 원점으로 돌아왔다.
한 줌에 가까운 윤수의 독자들은 글이 재미있다며 빨리 다음을 내놓으라며 윤수를 들들 볶기 예사였고, 그들에게야 윤수의 사회적 신분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인 것은 당연했다. 애초에 학생 신분이면서 실시간 연재라니 미친 짓이었던 건가 돌이켜 봐도 윤수는 간혹 이렇게 해내야 하는 일들이 몰아치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을 후회한 적은 없었다. 빡빡한 하루의 일과 중에서 아주 작은 틈을 파고들어 겨우 몇백 자나 쓰는 게 다였지만 그걸 며칠만 모아도 한 번 올릴 수 있는 분량이 나와주었기에 즐거웠다. 심지어 윤수 같은 아마추어 학생 작가는 제법 많았다.
완성도니 뭐니 하는 것을 떠나서 쓴 글이 쌓일수록 그곳에 자신도 미처 몰랐던 신윤수스러움이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윤수는 놀랍고 기뻤다. 흘려보냈어도 몰랐을 어떤 순간들을 어딘가에 모아두었더니 정체성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누군가는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나무랄지 몰라도 윤수의 엄마는 그런 윤수를 응원해 주었다. 오리지널도 아니고 2차 창작이어서 보여주기는 부끄러웠기에 보여달라는 엄마의 부탁을 거절했지만 언젠가 지금보다 좀 더 자란다면 그때는 기꺼이 엄마에게도 보여주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앱을 켜서 확인해 보니 학원 갈 때 타야 하는 버스가 오려면 7분이나 남아 있었다. 비어 있는 자리에 털썩 앉아 윤수는 다시 허공에 시선을 던진 채 머리를 바쁘게 굴렸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국어 수업 3시간이 끝나면 잠깐 저녁을 먹을 짬이 난다. 저녁을 먹고 나면 바로 옆 건물에 있는 영어 학원으로 옮겨서 또 특강을 들어야 한다. 그 수업이 끝나면 집까지 운동삼아 걸어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30여 분. 오늘은 천만다행으로 학원 말고는 다른 특별한 일이 없었다. 그 시간이면 충분히 한 회차를 구성할 수 있었다. 2차 창작의 좋은 점이었다. 집에 가서 한 시간 정도만 투자하면 다음 회차가 언제 올라오냐며 목을 빼고 기다리는 몇 안 되는 독자들에게도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윤수는 조금 신이 났다.
언뜻 봐서는 도무지 인생에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은 일, 쓸데없기로는 세상 제일일 것 같은 일. 그런 일들이 숨을 쉬게 하고 스스로를 북돋는 데 최고라는 걸 깨달을 만한 여유가 있었다는 게, 그런 너그러운 틈을 용인해 준 자신의 환경에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든 윤수가 고개를 슬쩍 빼고 왼편을 바라보았다. 윤수가 기다리던 버스가 오고 있었다. 윤수가 버스에 타기 위해 일어서던 순간, 윤수의 스마트폰이 한 번 더 반짝거렸다.
[작가님, 조금 늦어져도 기다릴게요, 몸 상하면서까지 하진 마세요... 근데 궁금하긴 해요.. ♥]
[표제어_겨를/모티브_김지숙 「종말주의자 고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