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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da Jun 15. 2022

순간을 산다는 것

그저 해본다, 집중하여 느껴본다, 단정하게 봉인해둔다. 

#. 마르모탕 미술관과 나

뜨거웠던 여름, 파리의 마르모탕 미술관에 내가 있었다. 클로드 모네의 작품 <인상, 해돋이(Impression, Sunrise)>를 바라보았다. 다른 작품으로 발길을 옮길까 싶어 시계를 봤더니 30분이 흘러 있었다.


2009년 8월의 10여 일을 파리에 있었다. 26살의 나는 국립부산국악원에서 행정인턴으로 일을 하고 있었고 외국계 회사에 다니던 친구의 해외출장에 나는 여름휴가로 같이 동행했다. 첫 해외여행이었다. 돌이켜보니 꿈같은 시간들이다. 이제와 그 10여 일을 떠올려보고 있자니 아직도 생생한 장면들이 남아있다. 지하철 역에서 미술관까지 걸어갔던 그 공원 길이 너무 예뻤다. 여름 하늘과 조금은 뜨거웠던 햇살, 들뜬 마음으로 도착한 미술관에 조용히 입장했다. 그리고 <인상, 해돋이>를 보고 있는 나. 방금 인터넷으로 검색해 그림을 보니 그리 큰 감흥은 없는데, 그때의 나는 그 찰나에 작품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30분이 넘도록 이 작품을 보았던 것만 기억한다. 젊고 건강한 26살의 내가 그곳에 머물러 하나하나 살펴보고 모네의 작품을 오래 느꼈다는 것, 그 순간이 지금의 나를 풍요롭고 따뜻하게 만든다.    


#. 샛별해수욕장과 우리

지난 주말,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장소는 고민하지 않고 바다. 아이가 바다를 너무도 좋아해서 태안의 바닷가로 떠났다. 인적이 드물어 한적한 샛별 해수욕장. 아이와 남편이 손을 잡고 깔깔대며 바닷가를 거니는 그 모습이 너무 좋아 계속 바라보았다. 깨끗한 바다, 맑은 하늘, 햇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물결, 부서지는 파도 소리, 계속 바다로 걸어 들어가는 작은 아이... 아이는 이 시간을 어떻게 기억할까. '파도가 나한테 오는 게 너무 좋아요'라고 말하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나는 너무 행복해서 슬픈 나머지 마음 깊은 곳에 이 순간을 봉인해 두었다. 


#. 옥동과 동석의 블루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가 끝났다. 마지막 회인 '옥동과 동석'편에서 죽음을 앞둔 옥동에게 아들 동석이 물어본다. "어멍은 언제가 제일 좋았어?" 그러자 엄마 옥동은 "너랑 한라산 가는 지금..."이라고 답했다.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는 어멍의 말은 너무도 삶이 고단하여 제대로 삶을 느껴볼 순간이 주어지지 않은 건 아닐지도. 아들이 한라산에 가자고 권유하자 망설임 없이 가겠다고 답하며 아픈 몸을 이끌고 눈 덮인 한라산을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에 얼마나 많은 감정들이 찍힐까. 옥동의 행복한 블루스를 동석이 동영상으로 촬영해 보여준다. 그 영상을 반복해서 돌려보는 옥동이 무척 행복해했다. 


#. 책모임과 나

2월, 나는 모든 게 정지되어 있는 듯한 일상이었다. 어떤 것도 내게 환기를 시켜주지 못했다. 그래도 아이를 돌봐야 했기에 힘껏 풍선을 불어도 보았다. 매듭을 묶기에는 역부족이었나, 손을 놓아버리면 금방 퓨욱 하고 바람은 빠지고 그 풍선은 어디로 날아가버렸는지 모르는 그런 상태였다. 공허하고 무기력했던 나는 '책모임'을 하면서 점점 좋아졌고, 모임이 끝나고 3개월이 지난 지금은 정신적으로도 아주 건강하다. 아직 어린이집을 다니지 않는 아이와 전보다 더 잘 지내고 엄마로서도, 그저 나로서도 꽤 균형을 유지하며 일상을 보내고 있다. 책모임이 나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 건 다름 아닌 그저 그 책모임이라는 바운더리 안에 내가 있었다는 것이다. 책모임이 주는 책을 읽고 페이퍼를 작성하며 그 틀에 내 몸을 맞춰보고 마음으로 익혀내는 것에 집중했다. 커다란 목표 없이 신청서를 작성했듯 신청서가 뽑히고 나서 '이 책모임을 하고 나면 생각하는 힘이 길러지고 좋아지나요?'라는 대책 없는 질문을 던졌지만 실은 어떤 기대 없이 그저 열심히 임했다. "피곤해도 책은 꼭 읽어보시고 페이퍼를 작성해 보세요."라는 구성원 한 분의 말에 의지했다. 내가 그 순간을 열심히 살았다는 것, 책모임을 하는 시공간에 한 주도 빠짐없이 있어 보았다는 것, 그것을 하면서 함께 모인 사람들의 온기를 받아 나의 몸과 마음에 일어나는 변화에 집중할 수 있었다는 것. 그것이, 그 순간이 전부다. 그 시간이 지금의 나를 북돋운다.



순간을 산다는 건 뭘까. 커다란 기대를 갖지 않고 두려움 없이 그저 해볼 것, 그 과정에 모든 감각을 열어놓고 느껴볼 것, 그리고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단정하게 봉인해두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왔던 순간들은 흐름 속에 머물러 있다. 나는 어떻게든 계속 흘러가겠지만 머물러 있는 그 봉인된 순간들이 열두 폭 병풍이 되어주어 나를 좀 더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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