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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da Apr 04. 2023

나를 만든 기억들

내가 충분히 사랑받았던 순간들

새벽 5시. 아이가 작은 울음소리를 낸다. 새벽에 잘 깨지 않는데, 쉬가 마렵거나 열이 나거나 둘 중 하나. 온통 뜨겁다. 오전에 병원에 다녀와 힘없는 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점심을 준비하는데 점점 더 축 쳐진다. 핑크퐁 장난감에서 흘러나오는 동요를 멍하니 듣고 있다.

"업어 줄까?"

"응"

"엄마 손이 약손이다~ 우리 세원이 아프지 마라~"

아이를 업고 노래를 부르며 집안을 산책했다.

"그만 돌아다니고 침대에 누워 자자."

낮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열이 펄펄 끓는다. 40도. 해열제를 또 먹이고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다 바람막이만 입혀 안고 병원으로 갔다. 독감도 아니고 단순히 열이 지속되는 감기는 또 처음이다. 해열제 교차복용을 해보고 하룻밤 더 있어보자고 한다. 다행히 저녁은 다 먹었다. 응가도 했다. 아이를 재우러 침실로 가서 책을 읽고 불을 끈다. 씩 웃다가, 내 배 위에 올라갔다가, 불편하다며 다시 내려갔다가, 베갯잇 사이로 발가락을 집어넣는 아이 옆에 누워있는 나는 아이가 잠이 들 때까지 기다린다. 기다리며 머릿속으로 글을 쓴다. '나를 만든 기억들에 대해'.

오래전 일들이 서너 가지 떠오르는데, 나를 만들어 준 기억들은 모두 다 내가 어떤 존재들로부터 충분히 사랑받고 있었던 순간이었네. 영화 <우리의 20세기>에 주인공 도로시아가 책의 한 구절을 읽어주는 아들 제이미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주 인상 깊었다. "난 책 없어도 나를 잘 알아." 나도 나를 잘 안다. 내가 직접 겪어 살아내 온 삶이 곧 나이므로. 책은 나를 환기시켜 또 다른 방식으로 나라는 사람을 확인시켜 준다고나 할까.


부모님 댁에 가면 아직 내 책상이 있다. 지금은 엄마가 화장대 겸 잡동사니를 수납하고 있는데, 책장 맨 아랫칸에 종이박스가 하나 있다. 내 어린 시절 보물상자다. 그 안에 들어있는 물건들 중에 반은 편지다. 여러 사람들에게 받은 편지. 그중 중학교 동창인 세라의 편지가 아주 많다. 안세라. 중학교 2학년 같은 반이 되면서 아주 친하게 지냈다. 나의 여러 모습들을 좋아해 주고 칭찬해 주고 부러워하기도 샘을 내기도 했던 친구. 우리는 서로 많은 것들을 나눴는데, 특히 음악을 공유했다. 나는 주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가요를 녹음해서 테이프로 만들어 주었는데, 세라는 집에 있는 CD를 테이프에 옮겨 담아 내게 선물했다. 세라의 아버지는 음악을 아주 좋아하셨다. 덕분에 나는 그때부터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을 듣고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동경하는 이소라를 시작으로 권진원, 더 클래식, 원미연, 조지 윈스턴, 짐 브릭만, 리처드 스톨츠만, 데이브 그루신... 이땐 그런 음악에 대해 전혀 몰랐지만 친구가 선물로 준 테이프가 그저 좋아서 듣는 음악들은 내게 여과 없이 흡수되었다.


23살, 대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휴학신청을 하고 4월의 어느 날 해인사에서 1주일을 머물렀다. 고속버스를 타고 도착한 날, 4월에 눈이 흩날렸던 기억이 선명하다. 눈을 맞으며 원주실을 찾아갔다. 그 당시 해인사의 원주스님과 인사를 나눴다. 스님과 단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눴을 뿐인데, 내 고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눈 녹듯 순간 사라졌다. 해인사에 머물며 새벽 3시 해인사에 울려 퍼지는 북소리를 듣고, 새벽예불의 광경을 보고, 식목일엔 2천 그루의 묘목도 심었다. 남는 시간에는 산책을 했다. 아주 많이 걸었다. 따스한 햇살이 잔디 위에 내려앉았다. 아무도 없는 산책길. 초록의 나무와 신선한 공기, 따뜻한 볕-  잠시 바윗돌에 앉았다. 가만히 눈앞의 풍경을 보았다. 그리고 잠시 그대로 누워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Swan Yard를 들었다. 23살, 모든 감각이 예민했던 그 여자 아이에게는 시간이 멈춰버린 순간이었다.


8년간 기업교육 강사로 일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회사에 들어가 처음부터 배웠다. 강도 높은 스케줄이었고 좋아하는 마음과 열정이 없었다면 지쳐서 그만두었을 일이다. 주말에는 대학원을 다니며 공부했다. 본격적으로 강사에 투입되면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일했다. 아이를 키워내는 지금의 내가, 돌이켜보면 꿈같다. 그저 나만 존재했던 시간, 어느 누구보다 내가 제일 소중했던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8년의 시간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내 딸 세원은 어느덧 만 3살이 되었다. 39개월이라는 아이의 시간 속에는 아마도 엄마가 8할이겠지. 지금 세원이가 '나는 엄마의 사랑을 흠뻑 받고 있구나' 느끼길 바란다. 나의 친구 세라에게 충분히 사랑받았고, 인적 드문 산책길에 있어준 나무, 바위, 바람, 음악에게 충분히 사랑받았다. 강사라는 직업을 갖고 그 세계를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준 존재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다.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나를 만드는 것 같다. 이미 나는 거의 다 만들어졌다. 아이를 다 키워내면 나는 완성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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