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친다'는 것 그리고 '뭉클하다'는 것.
'마주친다'는 것.
5년째 살고 있는 연고 없는 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알고 지내는 육아동지와 마주친다. 매일 특정 시각에 아파트 흡연구역에 나와서 딱 담배만 피우고 가는, 인사하고 지내는 어떤 사람과 마주친다. 아이와 외출을 하면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 순간 따듯한 손길을 건네는 친절한 사람을 마주친다. 내일이면 39개월이 되는 아이와 하루종일 지내면, 순간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아기 동물이 온 집안을 돌아다니는 장면을 마주친다. 1년 연애하고 결혼한 남편과 아이를 낳고 살면서 전혀 알지 못한 새로운 면들과 마주친다. 4월의 봄날, 오래된 아파트 산책로에서 잎이 무성해진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과 고목들의 눈부신 아름다움을 마주친다. 그리고 나무 사이로 햇살이 자아내는 그물 같은 그림자가 바닥에 일렁이면 어떤 뭉클함과 마주치게 된다.
'뭉클하다'는 것.
생활반경이 아주 좁은 지금의 내가 그 어떤 뭉클함과 마주치게 되면 이내 슬픔의 감정이 북받쳐 가슴이 꽉 차게 된다. '뭉클하다'는 것에는 슬픔이나 노여움 따위의 감정이 포함되어 있으니 '그래,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이구나' 알아차리고 잠시 머무른다. 뭉클함과 마주치게 되면 한순간 혹은 한동안 움직일 수 없게 된다. 현재 내 역할의 대부분은 엄마 그리고 주부인데, 특별한 경우나 처지를 마주치는 일 없이 일상이 흘러간다. 쉼 없이 흐르는 일상에 어떤 사건을 '마주친다'는 그 자체 만으로도 뭉클하다.
시간을 거슬러 20살 대학시절, 우리 학과 맞은편엔 무용학과가 있었다. 무용학과에 재학 중이던 학생이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성인발레를 강습하고 있었다. 학교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강습생을 모집한다는 글을 읽고 찾아갔고 그때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취미로 배웠지만 워낙 열성적이었던 선생님(학생) 덕분에 발레꿈나무처럼 열과 성을 다했다. 중간에 쉬기도 했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2년 정도 더 했으니 배우는 중에는 진심을 다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이 머리칼 사이로 땀을 흘리며 동작을 해나가는데, 나도 모르는 눈물이 함께 흘러내렸다. 여러 감정이 목 끝까지 차올라 북받쳐 흘러내린 눈물. 그런 비슷한 경험을 살아가면서 여러 번 하고 있다. 특히 몸을 움직일 때-요가, 명상이나 걷기 혹은 집안일 심지어 아이를 업고 있을 때에도 뭉클해진 감정이 눈물로 해소가 되었다. 어떤 형태이든 나에게 몸을 움직이는 일은 나와 잠깐의 거리를 두는 일인 것 같다. 나와 필요한 만큼의 거리를 유지해서 나 스스로에게 지치지 않는 마음을 갖도록 애써보는 것이다.
'나는 그저 슬픔이라는 감정을 크게 갖고 있는 사람인가.' 잠시 생각해 본다. 낮잠을 자고 있는 정말이지 고양이 주먹 같은 아이의 움켜쥔 손을 바라볼 때, 등원하는 아이의 차량을 기다리는데 까치가 나뭇가지를 물고 나무 위로 날아올라 집을 짓는 장면을 아이와 함께 보았을 때, 여리고 작은 연둣빛 나뭇잎들을 올려다볼 때에,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에 슬픔을 안고 있는 뭉클함이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