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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간을 살아낸 어떤 나를 기념하며

박연준 <월드 발레 데이>에 붙여.

by brida

몸이 순간적으로 불에 덴 듯 화악 뜨거워진다. 통증. 오른쪽 목에서 시작해서 오른 어깨, 오른 팔뚝까지 이어지고 어떤 날은 오른팔의 더 아래까지 그리고 왼쪽 팔뚝으로 불씨가 번진다. 그러다 목덜미가 전체적으로 아파와, 두통으로 끝난다. 동네의 작은 병원을 가보고, 차를 타고 좀 더 큰 병원으로 가보고 마지막엔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가 진료를 보았다. 목뼈에서 디스크가 탈출해 신경을 압박하고 온몸으로 퍼지는 신경의 뿌리를 건드리면서 통증이 시작된다고 했다. 목디스크라는 병을 인정할 수 없어서 병원 여러 곳을 가보았던 것 같다. 그래, 이제는 인정한다. 이 통증을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경추 분야의 최고 전문가라는 서울의 의사는 본인이 통증을 견딜 수 있으면 사라질 때까지 두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치료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감기에 걸렸을 때 침대에 누워 끙끙 앓다가 햇볕을 쬐기도 하며 일주일 정도 아픈 시간을 보내니 회복된 경험이 있다. 디스크도 적정 시간을 흘려보내면 치유가 된다는 것이다. 운동하면서 재활하면 되는지 물어봤더니, 운동과는 상관없다고 본인이 아픈데 굳이 견딜 필요는 또 없단다. 처방해 준 6주 치의 약을 먹으면서 생각한다. 그냥 한 번 안고 있어 볼까? 아직은 통증을 끌어안고 있을 수 있다고 나를 믿어볼까. <월드 발레 데이>에는 통증을 ‘몸에 사는 새’라고 했다. 아름다운 새 한 마리를 몸 안에 두어볼까. 주사를 놓고 시술을 하고 급기야 수술을 해가면서까지 몸에 사는 새를 밖으로 내쫓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가장 최근의 통증은 6년 전 아이를 제왕절개로 낳은 직후다. 배를 가르고, 그 안의 근육을 가르고, 자궁을 가르고... 아마도 여러 겹을 가르고 갈라 아이를 안았겠지. 그 즉시 여러 겹을 꿰매고 꿰매고 꿰맨 후 마취에서 깨어나니 어마어마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런데 거짓말 아니고 정말로 행복했다. 병상에 누워서 진심으로 행복해했던 기분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이를 낳은 경이로움과 기쁨으로 한가득 충만했다. 그때도 나는 내 몸 안에 날개를 펄럭여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새를 와락 안고 있었다.



나는 2010년 10월부터 2018년 2월까지 기업교육강사로 일했다. 그 시간을 저 깊은 곳에 봉인해 두고 나는 또 다른 삶을 이어가고 있다. 7년의 시간이 흐르고 오늘, 묶어둔 그 시간을 기념해 두어도 괜찮지 않을까 한다. 어쩌면 아름답고 눈부신 20대와 30대의 내가 그 시간 속에 살아있기에. 아직도 살아있어서 그때를 좋은 기억으로 추억하는 나를 발견했다. 40대가 되었고 그러고도 2년을 더 살았더니, 마치 지금 가장 친하게 지내는, 30대 초반의 은서엄마를 내가 너무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듯이, 7년 전의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신기하게도 시간이 묘약이 되어 힘들이지 않고 좋은 기억만 떠오르게 한다.

입사해서 2년은 전문강사를 보조하며 온몸으로 기업교육강사의 스킬을 배웠다. 2년이 지나고 주말에는 대학원을 다니며 공부하고 월요일이 되면 출근을 하는 시간을 2년 반 동안 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기업의 인사담당자를 만나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고 뜻이 맞으면 신입사원교육을, 계층별 교육을, 전사원교육을 성사시켜 함께 했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손수 만든 교육과정을 사원들에게 선보이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인사담당자에게 인정을 받았고 같이 일하는 직원에게도 응원을 받았다. 서울에서부터 제주도까지 전국을 돌아다녔다. 세상의 모든 장소가 나의 일터이고 무대라 여겼다. 책임급의 사원들을 한 교육장에 모아 놓고 무사히 과정을 운영하고 나서는 그 중압감과 더불어 해방감에 구석진 곳에서 혼자 날 듯이 껑충껑충 뛰어다녔다. 신입강사 때는 과목을 이해하지 못한 채 투입이 되어 강의자료를 슬쩍슬쩍 보면서 진행했던 적도 있고, 보조강사로 들어간 나에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하세요!’라는 충고를 듣고 정말로 죽인지 밥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태로 겨우겨우 시간을 마친 적도 있었다. 그 당시에는 수행능력보다는 ‘실행’에 빠져야만 했다. 가능성은 실행을 해봐야만 알 수 있었다. 어떤 날은 강사로서의 가능성을 맛본 날도 있고 어떤 날은 내 자신이 멍청이 같아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서 울고 싶었던 날도 있었다. 나를 관리하던 소장님은 잘할 수 있다고, 어느 나의 생일날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굳건하게 걸어가세요’라고 손편지를 남기셨다. 지금도 현업에 계신 그분의 메시지를 지금에 와서야 다시 되새겨본다. 끊임없이 수행하고 수련해야 하는 직업이고 자신에게 그런 삶의 방식이 맞다면 강사는 아주 좋은 직업이라 생각한다. 그 편지를 아직 간직해두고 있다.

어느 날은 같이 지방 출장을 갔던 직속 후배가 말했다. ‘과장님은 너무 여유롭게 일하시는 것 같아요. 너무 쉽게 일하는 것 같아서 저도 곁에서 배우다 보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때의 나는 사실 물속에서 두 발로 부지런히 헤엄치고 있었던 때였다. 보이진 않지만 아침 일찍 출근해서 혹은 전날 밤에 할 일을 미리 정비해 놓고, 정해진 시간에 관리 기업 목록을 열어 안부 전화를 돌리고, 집에선 스트레칭하고 책 읽고 강의자료를 들춰보았다. 그 밖의 생활은 없었다. 친구도 없었고, 부모님께 안부전화를 드리지 못해 걱정 끼쳐 드렸고, 취미생활도 없었다.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좋았다. 이 일을 진심으로 좋은 마음을 갖고 성을 다해 하고 싶었고 좋은 영향을 끼쳐보고도 싶었다. ‘계속 좋았다’. 계속 좋다는 의미는 ‘계속해서 나의 재능을 좋은 방향으로 감각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잘하고 있다는 기분을 온몸으로 느꼈다. 기업교육이라는 도구로 다양한 기업의 인사담당자를 만나고 연수원 강의실에서 처음 만나는 교육생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긴장되고 즐거웠다.


언제부터였을까. 일에 전념하는 사이, 내가 이 일로부터 통증을 느끼기 시작한 건 더 이상 이 직장에 몸 담을 수 없음을 알아채던 순간이다. 그 봉인된 시간 속 중심엔 나를 전적으로 지원해 주던 사람이 있었다. 좀 더 유능한 강사로 만들기 위해, 이 회사에 몸 담는 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나아가 자유로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가르쳤다. 나를 열렬히 가르쳤다. 덕분이 나는 성장했지만 그 엄청난 가르침의 방식으로부터 떠나고 싶었다. 몇 명 되지 않은 직장 내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가 불편해졌다. 무기력함과 우울증으로 고립되기 시작했다. 몸이 아파와 출근할 수가 없어 일주일을 홀로 끙끙 앓았다. 기업의 재정이 어려워지면 제일 먼저 교육비부터 삭감하기에 회사 사정도 조금씩 어려워져 강의 횟수도 점점 줄었다. 한번 기울기 시작하는 회사는 다시 똑바로 서기가 너무도 힘들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어떻게 해도 이 안에서 나의 능력으로 나의 자리를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고, 누구도 나의 통증을 공감해 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급기야 열렬히 사랑했던 일 마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깊은 슬픔이 거친 파도가 되어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어떻게 해도 안 되겠구나.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한 경력이 어느 순간 화석이 되어버린 걸까. 나 또한 많은 사람들처럼 결국 ‘뛰다가 걷고 중단하고 돌아가다 숨어버렸다’. 숨은 장소에서 다시 나오는 방법을 그때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의 말할 수 없는 통증을 혼자 끌어안고 있었다. 이 통증의 인과관계를 명확히 세세히 설명할 자신은 없다. 지금에 와선 일과 멀어져 버린 그 거리감이 가장 쓰라릴 뿐이다.


이제는 빛과 어둠이 교차했던 그 시간들을, 오랜 해안 같은 어르신의 따스한 눈빛으로 그 가르침을 받았던 시간을 포함하여 모두 함께 소중히 기념해 두고 싶다. 창고 어딘가에 깊숙이 숨겨두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두려움 없이 흔들림 없이 나를 믿고 걸어갔던 그 시간이 먼지를 걷어내니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었다. 그때의 내 몸과 마음, 수북이 쌓인 자료들, 내가 이뤄낸 성과, 관계 맺은 사람들, 온 우주의 사려 깊은 도움까지도. 사라지고 없지만 다른 형태로 내 안에 남아있다. 덧없다 생각해 버렸지만 이제는 부디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빛을 살살 달래어 촛불에 옮겨두고 천천히 셋을 세련다. 눈을 감는다. 그 시간을 살아냈던 어떤 나를 기념한다.

비 오는 오후 딸 세원이와 심심하게 놀다가 책장 가장 아래 칸에 꽂아 둔 파일을 꺼내 보았다.

- 세원아, 이것 좀 볼래? 엄마의 보물이 들어있어!

보물이라는 말에 내 옆에 찰싹 붙어 들여다본다. 파일 안에는 20대 초반에 누군가 그려준 나의 초상화 한 점과 캐리커쳐 한 점이 들어있고, 기억해 두고 싶은 크고 작은 전시회나 공연의 예매표와 팸플릿이 들어있고, 간직해두고 싶은 세원이가 탐내는 예쁜 엽서나 스티커가 들어있고, 소중했던 친구의 청첩장이 들어있고, 가족의 편지가 들어있고, 때마다 친하게 지내었던 친구들의 작은 손편지가 들어있고 그리고 ‘2017년 2월 1일 깊은 밤’에 내가 나에게 쓴 편지가 들어있다. 퇴사하기 1년 전의 편지가 마냥 따뜻하다. 따뜻함이 또 예뻐서 눈물이 난다. 편지를 옮겨 적을 수 없지만 ‘후회 없이 살았다’는 첫 문장과 ‘감사하고 고마워해야지’라는 문장을 적어두고 싶다. 내가 내게 따뜻하게 덥혀놓은 방석을 깔아주며 속삭인다. ‘여기 앉아서 다시 시작해 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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