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처럼 오래된 사람들
"그리고 해안에 서서 바다를 내다볼 때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걸
영원히 기억하기 위하여"
책을 펼치면 아르헨티나의 작가 루이스 사가스티(Luis Sagasti, 1963년 출생)의 짧은 글이 적혀 있다. 이 글을 읽으니 영화 'Hope Gap'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 2022)의 인상 깊은 장면이 떠올랐다. 영국 런던 근교의 seaford, 해안 마을. 이 마을의 관광 명소인 Seven Sisters Cliffs는 'Hope Gap'으로 불리며 그레이스와 제이미 둘이서 혹은 그레이스 홀로 자주 오르던 해안 절벽인데, 영화에서 중요한 장소다. 이 해안절벽을 아주 매력적으로 보여주어서 나도 마치 그곳에 있는 것처럼 매번 아주 큰 호흡을 내쉬었다. 그리고 분명 그 아름다운 바다가, 자연 풍광이 그레이스의 어두운 시간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도록 곁을 내어줬다 생각한다.
출처: 네이버 영화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 스틸컷
소설 『벌집과 꿀』의 7편의 단편 안에 그려 넣어진 인물들을 한 명 한 명 떠올려본다.
'보'라고 불리는 보선, 같은 방 동료 재소자 로저, 몬트리올 어딘가 아들을 두고 온 여자 카로, <보선>
바르셀로나에서의 주연과 니콜라이 코마로프, <코마로프>
조선인 소년 유미, 주군을 모시는 야마시타 도시오와 히로코, <역참에서>
부모님의 어린 시절이 궁금한 해리와 그레이스, 그리고 후드를 뒤집어쓰고 해리네에 온, 아마도 크로머에서 온 아이, <크로머>
스물두 살인 안드레이 불라빈과 우수리스크 지역에서 엄마, 아빠를 잃은 여자 아이, <벌집과 꿀>
'나는 혼자서도 괜찮아요, 우리 가족 중에 다른 누군가가 더 있나요? 다른 어딘가에?' 라며 아버지 바실리에게 묻는 열여섯 살 막심 <고려인>
농사짓는 집안에서 태어나 정착지에서 다시 달의 골짜기로 돌아온 서른한 살의 동수 그리고 은혜와 운식. "매일 밤 여기서 달이 뜨고, 기울고, 부서졌단다. 그러고는 스스로를 다시 만들어냈지.", <달의 골짜기>
사실 나는 디아스포라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얼떨결에 기억하고 있는 역사적 내용 말고는 이들이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다 가버리는지에 대해선 상상할 수 없었다. 책을 읽는 동안, 러시아 극동지방의 도시들을 찾아보려 지도를 열어 보고, 고려인 공동체, 사할린섬, 니브흐족 등을 검색해보기도 했는데, 그래서 더욱이 소설이지만 실제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다가왔다. 이들 삶이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어 보이지만 어쩌면 감히 내가 추측할 수 없는 아주 여러 겹의 빛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여러 겹의 빛으로 서로가 서로의 풍경이 되어주기도 한다.
디아스포라에 속한 사람들의 일상은 아마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지 않을까. 한편, 아주 많이 다를 것이다. 자신의 뿌리를 찾아서, 집을 찾아서, 가족을 찾고 싶은 열망과 갈망 속에 결코 만날 수 없는, 찾아낼 수 없는 공허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들의 내면에 붙들려 있던 것이 무엇이든 시간이 지나면서 빠져나가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슬픔과 분노와 비통이 점철된 채로. 7개의 단편에는 과거를 찾아 그 시절을 머물러도 보고, 계속해서 기억을 찾으려 노력하고, 통화는 끊어졌지만 여전히 전화기에 귀를 대고 그 짧은 찰나 지난 시간을 떠올려 애쓰지만 이내 스르륵 사라진다. 내가 그런 옛 기억이 있기라도 한 걸까? 꿈에서만 존재했던 환상이 아니었나? 이렇게 자신의 지나간 시간을 의심하는 장면들이 아주 많이 나온다. 하지만 조금은 알 것 같다. 너무나 그리우니 어쩔 도리없이 깎아지른 듯한 오랜 해안 절벽에 서서 아득하게 넓은 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겼다 사라졌다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희망을 저버리기에는 광막한 풍경이 또한 너무 아름다우니까. 그렇게 살아내다가 어느 날엔, '선교사에게 배운 요령'으로 '길을 만들어내'는 것일 테다. "벌집으로.", "그리고 꿀이 있는 곳으로.".
모처럼 특별하고도 아름다운 소설책을 만나 한동안은 이 책이 계속 떠오를 것이다. 어쩌면 내가 이들을 좀 더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애써 소설 속 이야기들을 떠올리려 노력하며 책상 위에 두고 읽고 덮어두고 읽고 덮어두고를 반복할 것 같다. 광활한 사막이나 모래알이 떠오를 때도 있지만 아름답게 번역된 문장들이 아주 많고 이들이 결국에는 단 한 사람 일지라도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어 한다는 걸 알게 될 때 이 책을 더욱더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한다. 김소연 시인의 추천사도 너무 좋고, 서제인 번역가의 옮긴이의 말도 한 편의 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