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OO과 이별 그리고 새로운 여행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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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 이어...>
하루에 수회씩 몸통부터 다리까지 사진의 흰색 크림을 사정없이 발라댔다. 삶의 희망과 아르헨티나 이민에 대한 기대를 잃어버리고 실의에 빠져있을 때 바로 그 베드버그 숙소 '남미OO'의 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안 그래도 그곳에서의 악몽 같았던 시간에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이른바 '한 따까리' 타임이 왔구나 싶었다.
이거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저한테도 다른데서 물려왔단 말은 못 하시겠죠?
나는 화가 폭발해 물었다. 베드버그에 물린 이후로 몸과 마음이 모두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실랑이가 오갈 줄 알았지만 의외로 '남미OO'측에서도 자신들의 관리 소홀을 인정했다. 우선 지난번 옥상에 널어놓은 옷가지 등을 가져다주겠다며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고 한다. 솔직히 뭘 더 이야기할까 싶지만 그래도 내 옷도 받아야 하고 그곳과의 악연을 확실히 끝내고 싶었다.
잠시 후 SUV를 몰고 도착한 '남미OO' 여사장은 먼저 나에게 사과의 말을 전했다. (비싼 차 모는 것 보니 여기에서 그렇게 돈을 벌었단 말이 사실인 듯하다... 급... 배가 아파 온다...) 그동안 수많은 여행객들이 그곳에서 베드버그에 물려 장렬히 산화했다. 그때마다 숙소 스탭들은 서로 회피만 하더니 크게 컴플레인 제기하고 자신들의 책임이 명백해지자 드디어 대표한테 사과 및 소정의 세탁비를 보상받을 수 있었다. 다행히 배와 등까지 타고 올라오던 베드버그 발진도 마법의 크림 덕택에 빠른 속도로 진화되고 있었다. 오늘은 털려버린 몸과 멘탈을 위로하기 위해 마트에서 세계 최고로 일컫는 아르헨티나 쇠고기로 스테이크를 만들어 먹기로 했다.
세계 최고의 소고기를 우리나라 닭고기보다 싸게 즐길 수 있는 아르헨티나! 어디 가서 대한민국 한우가 최고예요...라는 말 들으면 좀 부끄럽다... 여하튼 소고기 꽃등심 부위를 사서
새로 옮긴 훨씬 깨끗하고 친절하고 오히려 가격까지 싼! 숙소에서
새 출발을 알리는 스테이크 컷팅식이 진행되었다. 저렇게 두 덩이가 만원 정도였던 것 같다.
다사다난한 일주일을 보내고 다니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내 관광지는 대부분 둘러볼 수 있었다. 계속 시내 관광만 하기엔 의미가 없으니 아르헨티나의 또 다른 명소 '이과수 폭포'를 보러 가기로 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이과수 까지는 버스로 약 16시간이 걸리는 일정이다.
좌석이 반쯤 뉘어지는 침대차 2층 맨 앞자리에 탑승해
이과수 폭포를 향해 출발했다. 한국을 떠나 올 때 아르헨티나에 가게 된다면 꼭 가봐야 할 곳 하나가 바로 세계에서 가장 큰 이과수 폭포를 가는 것이었는데 생각보다 그 목표를 빨리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차창밖으로 펼쳐지는 남미의 풍경을 보면서 마음 한편으로 아르헨티나 관광 명소를 너무 빠른 시간 내 클리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함도 있었다.
...
잠시 졸았던 것일까? 눈을 떠보니 차창 밖은 까만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없다면 어디가 길인지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을 향해 가고 있었다. 천천히 나아가던 버스가 도로 한쪽에 차를 세웠다. 잠시 후 아래층에서 기사가 버스에서 내려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그 소리에 2층에서 잠을 자던 승객들이 하나씩 일어나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좀 전까지 잠에서 깨어나오지 못했던 나도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다. 승객들이 웅성대며 무언가 말을 하는데 스페인어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의자 밑에 있던 배낭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본다. 버스 밖에서는 계속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의 고함이 앞뒤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 이과수 가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일주일 만에 베드버그에 물려 멘탈이 털리고 이제 좀 회복되나 했는데 또다시 이런 사고가 생기니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또다시 답 없는 짱구를 굴리고 있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까? 사이렌 소리와 함께 경찰인지? 군인인지 모를 차량이 도착했다.
2층 버스에서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욱 커진다.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무슨 일일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사이렌을 울리며 도착한 차량에서 두 명이 내려 버스 쪽으로 다가왔다. 국방색 유니폼, 검정 워커, 각진 모자, 팔과 가슴에 찬 완장, 밴드, 그리고 허리춤에 권총으로 보이는 무언가 까지... 경찰보다는 군인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아...(믿지는 않지만) 하느님! 무슨 시련을 시리즈로 주시옵니까!
불안한 마음에 배낭에 있던 여권을 빼서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아르헨티나에 올 때 할 수 있는 스페인어라고는
나는 돈이 없습니다! 나는 직업이 없습니다!
만 알고 왔는데 지금이라도 책을 펴서 '나는 아르헨티나를 사랑 하무니다!'라는 표현도 익혀야 하나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어쩌자고 회사 때려치우고 남미까지 와서 셀프 빅엿을 먹고 있나... 하는 생각을 하던 찰나, 버스 주위를 배회하던 군인(?) 중 한 명이 버스 2층으로 올라왔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