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 보호 후기
“건우야!!“
엄마는 아이를 부둥켜안고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는 이내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도 이 쇼핑몰에서 아이를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아내와 나는 짠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크리스마스 저녁이었다. (물론 아이의 이름은 가명이다)
아이가 많은 동네에 살면서 종종 겪는 일이다. 몇 달 전에도 공원을 걷다가 혼자 울고 있는 아이를 만났다. 공원 관리과에 전화해 방송을 부탁하고, 아이가 지나온 동선을 한참 거슬러 올라간 끝에 아이를 부모 품으로 돌려보내줄 수 있었다.
두 번의 미아 보호(?)를 경험하고 깨달은 게 있다. 아이를 찾아주고도 제대로 된 인사를 듣지 못할 수 있다는 것. 물론 감사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다 해도, 인사 한마디 없이 자기 아이만 챙겨 휙 떠나는 부모를 보았을 땐 야속함이 느껴졌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냥 이해하기로 했다. 나 역시 아이를 잃어버려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때 그 부모가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행동했을지 어느 정도 짐작이 되어서다.
그날을 떠올리면 지금도 심장이 두근거린다. 아이가 시야에서 사라진 걸 안 순간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해졌다. 멍하니 아이 이름을 외치지도 못하고 있다가 아내에게 꾸지람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아이는 근처 노점 아주머니 곁에 서서 울고 있었다.
아이 손을 건네받을 때도 여전히 정신이 없었다. 놀랐을 아이의 마음과 새까맣게 타들어 간 내 속을 살피느라 은인에 대한 진심 어린 감사는 뒷전이 돼버리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판대 위의 물건이라도 몇 개 팔아드리면서 마음을 전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저 가벼운 인사만 몇 마디 드리고 꿈에서 깬 듯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어쩌면 아이를 잃어버렸었다는 끔찍한 사실을 내 온 정신과 육체가 ‘그런 일 없었어’ 하며 밀어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렇게 밖에 감사를 표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의아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충분히 이해한다. 가던 길 멈추고 들인 내 시간과 수고가, 그들의 작은 결례가 무슨 대수일까. 세상에 쓰여질 뻔한 슬픈 이야기 한 편을 지워낸 것 만으로 나는 만족하고 안도하며 돌아설 수 있다.
같은 맥락과 경험은 이해를 돕는다. 그런 면에서 아이를 키우는 일이 갈수록 어려워지겠다는 생각을 한다. 출산율이 줄어든다는 건 단순히 우리 사회에 아이가 줄어든다는 것뿐 아니라, 육아라는 삶의 맥락을 공유하는 가정이 줄어들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비단 육아의 문제만은 아니다. 나날이 파편화되어가는 개개인의 신념과 상황들은 서로를 이해함에 있어 분명 전보다 많은 노력을 요구하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경험하고 느낀 것을 이렇게 곱씹고 써내려가며 삶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일이다. 사정 모를 누군가의 행동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일이다. 그렇게 나에게는 민감하게, 타인에게는 조금 둔하고 따뜻하게 세상을 살고 싶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