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한다는 말에 자격이 필요할까

취미와 취향의 주도권에 대하여

by 광현




아내와 연애 초반에 애정표현 문제로 많이 다퉜다. 아내는 내가 사랑한다고 자주 좀 표현해주길 바랬지만 그게 참 어려웠다. 마음속에 말을 뱉어내는 상자 같은 게 있다고 치면, 난 좋아하는 감정이 그 속에 차곡차곡 쌓이다 넘칠 때쯤 되어야만 "사랑해" 하고 한 마디 겨우 토해내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진심이었겠지만, 아내는 그 말을 자주 들어야 사랑이 충족되는 사람이라 힘들어했다. 서로 적응하는 데 시간이 꽤나 걸렸다.


조금은 다른 얘기일 수도 있지만 취미나 취향에 있어서도 뭔가를 좋아한다고 가볍게 말하는 게 어려웠다. 즐긴다, 선호한다 말하려면 그만한 자격이나 조건이 충분히 갖춰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독서가 취미라면 책을 한 달에 두세 권은 읽어야 한다거나, 커피를 좋아한다 말하려면 이름 있는 카페들을 어느 정도 섭렵해야 한다는 식이다. 적어도 내 주변 사람들의 평균 이상으로 잘하거나 많이 아는 것만이 내 취미나 취향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박한 기준으로 살면서 나라는 사람에 대해 점점 할 말이 없어지는 걸 느꼈다. 보통 어디서 자신을 소개할 때는 직업, 사회적인 역할, 취미나 취향 같은 것들을 버무려 설명하곤 하지 않나. 평범한 월급쟁이에 한 집의 가장이라는 타이틀은 다른 사람들과 나를 구별해주지 못했다. 게다가 이렇다 할 취미, 취향도 없으니 마치 내가 세상에 없는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표현에 좀 관대해져 보기로 했다. 좋아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이것저것 재지 않고 주변에 얘기하거나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와인, 재즈, 러닝, 커피 브루잉, 독서, 글쓰기, 막국수, 알리오올리오, 명란바게트, 그래놀라, 젤라또, 만두전골, 버섯나물, 장기하... 또 뭐가 있지. 그렇게 마음먹은 뒤부터 좋아하게 된 것들이다. 최근 2년 동안 갖게 된 취미와 취향이 31년 간 누려온 것들보다 훨씬 많다. 가볍게 뱉은 말들에 힘이 있었다. 정서적으로 가난했던 일상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내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만한가. 그들 앞에서 은근하게 자랑할 수 있는 평균 이상의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는 얘기다. 전혀 그렇지 못하다. 와인은 한 병에 3만 원만 넘어가도 여전히 부담스럽고, 재즈는 제대로 듣기 시작한 게 겨우 작년 여름이다. 러닝은 5km 이상을 뛴 적이 없으며, 장기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최근이다.


그럼에도 그 주제들을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그것들과 나 사이에만 존재하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비싸고 좋은 와인을 다양하게 맛볼 수 있는 고급진 모임에 나가진 못해도, 육퇴 후 아내와 간단한 안주에 기울이는 만 원짜리 와인 한 병이 주는 행복이 있다. 장기하를 좋아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지만, 어느 지친 퇴근길에 노래로 위로를 받으며 시작된 나와 장기하 둘만의 특별한 서사가 있는 것이다.


그런 사사로운 감정과 이야기들을 나 아닌 다른 사람이 평가할 수는 없다. 내가 좋아하는 마음을 남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접근부터가 틀린 거였다. "그게 취미라고 말하려면 적어도 이 정도는 돼야지." 같은 말은 이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내가 표현하는 딱 그만큼이 진짜 내 삶이 되는 것 같다. 머릿속에만 스치고 마는 감정들은 나중엔 내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지 조차도 기억하기 어렵다. 일상에서 쏟아지는 즐거움들을 부지런히 말하고 쓰면서 하나라도 더 붙잡아야지. 눈치 보며 망설이다간 남는 것 없이 모두 놓쳐버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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