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그룹 HMG 칼럼니스트 1기로 활동하면서 Core Value Talk 사이트에 2020년 6월 22일에 게재한 글입니다.
질문 있으신가요?
수업이나 강연에서 강사가 청중들에게 궁금한 것이 있는지를 묻는 말이지만,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강의가 끝났다는 의미 정도로 통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씁쓸하지만 다들 특별한 질문이 없을 것이라고 어느정도 예상하기 때문입니다.
2010년 G20 서울정상회의에서 있었던 일화는 유명합니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폐막 연설 직후 한국 기자들에게 예정에 없던 질문 기회가 주어졌는데, 민망한 정적 끝에 결국 나선 사람은 중국 기자였다는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10년이 넘는 학창시절의 결과를 OMR카드 몇 장으로 평가받았던 우리는 ‘질문’보다 ‘정답’에 익숙한 세대입니다. 언제나 묻는 것은 시험지의 몫이었기에, 우리는 그저 답하는데 필요한 지식을 머릿속에 최대한 많이 담아 시험일까지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사회생활도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출처를 알기 어려운 업무 관행과 서열 중심의 보수적인 문화는 대다수의 조직 안에서 여전히 정답으로 대우받고 있습니다. 변화하려 애쓰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개인의 당돌한 질문이 허용되는 영역은 아직 그리 넓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지닌 최고의 탁월함은 자신과 타인에게 질문하는 능력" 이라고 말했습니다. 구글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받는 전 CEO 에릭 슈미트는 "구글은 답이 아닌 질문에 의해서 운영된다."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아마도 질문에는 제대로 누려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특별한 힘이 있는 듯합니다.
사실 질문이라는 도구는 모든 사람의 손에 공평하게 쥐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정답만 바라보다 사용하는 방법을 잊은 걸까요? 창의와 혁신을 위해서는 항상 호기심을 갖고 질문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일단 질문 자체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정작 질문이 떠올라도 '이런 걸 물어봐도 괜찮은 걸까?' 하며 마음속의 호기심을 여러 번 곱씹고 검열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곤 합니다.
혹시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은 우리의 퇴화된 질문 DNA를 어떻게 하면 회복시킬 수 있을지 함께 이야기해보았으면 합니다.
책 『AI시대 사람의 조건 휴탈리티』의 저자 박정열님은 과학기술 만능주의가 팽배한 현 시대의 모습과 기술역량에만 집착하는 오늘날의 인재상을 경계합니다. 인간이 기계와 차별화될 수 있는 역량은 다양한 경험 속에서 자신만의 의미체계를 만들어내는 ‘해석역량’이고, 미래 무대에서 인간이 설 자리를 지켜 내기 위해서는 이것이 더 이상 홀대 받아서는 안된다고 말이지요. 그리고 세상을 나의 방식으로 마주하고 해석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본질을 캐는 끊임없는 ‘질문’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자신 있게 질문하지 못했던 경험들을 돌이켜보면, 그 순간에는 내 안의 호기심에 대한 자기확신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말 그대로 ‘정답’이 아닌 ‘질문’인데도, ‘혹시 나의 물음이 오답은 아닐까?’ 하며 외부에서 기준을 찾으려 했던 것이지요.
스스로를 향한 질문이 먼저 필요합니다. 책에서 이야기하듯이 자신의 본질을 마주할 수 있는 물음이어야 합니다. 나의 직업이나 사회적인 역할로 설명되는 내가 아니라, 내 스스로가 정의한 나를 발견하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왜 지금 이 일을 하고 있나요? 우리가 진짜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시대의 다양한 변화를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세상을 향해 더 단단하고 반짝이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기 위한 이런 물음들이 필요합니다.
책의 저자는 본질에 대한 질문은 다른 사람이 해주는 경우가 잘 없기 때문에 스스로 부지런히 물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쉽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일상 속에서 부지런히 심고 또 심다 보면 어느 날 불현듯 싹이 트고 꽃이 피는 그런 주제들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우리의 질문 DNA는 꽤나 녹이 슬어 있습니다. 초보 농부에게는 질문의 파종을 도와줄 무언가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일기를 좀 써보면 어떨까요? 칼럼을 쓰면서 알게 된 건데 자기 성찰을 돕는 ‘질문 다이어리’ 라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독서도 좋을 것 같습니다. 책을 통해 갖게 되는 새로운 관점과 생각들이 나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끌어내 주지 않을까요?
여러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저는 일단 가볍게 시작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금 부끄럽지만 꾸준히 일기를 쓰고 독서하는 습관을 만드는 것에는 썩 자신이 없거든요. 자주 가던 카페에서 우연히 만나서 지금은 구독까지 하게 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잡지를 하나 소개하려고 합니다. 『컨셉진』 이라는 월간 라이프 스타일 매거진입니다.
컨셉진은 매달 한가지 질문을 주제로 선정합니다. 질문과 관련된 평범한 사람들의 인터뷰, 산책, 문화, 여행 등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주제는 매월 회의를 통해서 그때그때 정해집니다. 팀원들이 저마다 이번 달에 다루었으면 하는 아이템을 가지고 와서 서로를 설득하고, 또 설득을 당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주제를 선택하는 기준은 세가지라고 합니다.
1. “이 단어, 이게 있으면 우리 일상이 조금 더 나아져” 라는 확신이 있을 때
2. 접근 가능성. 평범한 일상에서 쉽게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주제
3. 만드는 우리가 먼저 행복해야 한다. 우리가 먼저 설득이 되고, 재밌겠다는 생각이 드는 주제
이들은 새로운 정보나 유행이 아니라 그저 ‘더 나은 일상’을 이야기합니다. 소재 자체는 평범하지만 내 속을 한 두 겹 정도 더 들추어내야 답할 수 있는 ‘본질에 가까운’ 질문들을 던집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근데 너는 어때?” 하며 독자들 스스로가 자기만의 답을 발견하도록 안내합니다.
편집장 김경희님은 “당신의 일상이 조금 더 아름다워집니다.”라는 그들의 슬로건에서 말하는 ‘아름다움’은 외형적인 뷰티(Beauty)가 아닌 ‘만족감’이라고 설명합니다. 저는 그것을 ‘나와 일상 사이의 일체감’으로 해석합니다. 일상은 자기 정체성의 근간입니다. 나의 하루를 내가 발견한 가치들로 채울 때, 우리는 그 소박한 일상을 만족스럽다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저는 컨셉진이라는 컨텐츠 자체도 물론 추천하지만, 만드는 이들이 전하려는 근본적인 메시지를 함께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방법은 무엇이 됐든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정체성을 점검하기 위한 본질적인 질문을 일상 속에서 부지런히 던지는 습관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정답이 없는 시대라고들 이야기합니다. 내일을 예측하기 어려운 기술의 발전,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은 크고 낯선 환경의 변화들. 우리는 지금껏 겪어본 적 없는 새로운 일상을 매일같이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제 세상은 “이 길이 정답이야!” 라고 외치며 곧장 내달리는 사람이 아니라, “왜 이 길을 가야하지?” 라며 자신과 타인을 향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그 여정에서 자기만의 가치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심는 일상의 소박한 질문들이 하나씩 답을 틔우다 보면, 언젠가 무성한 숲을 이룰 것이라 기대합니다. 스마트폰이 축적한 개인정보와 알고리즘만으로 속절없이 발겨지는 무채색의 빌딩 숲이 아니라, 사람의 시선과 발걸음으로 그 속을 자꾸만 들여다보고 싶고 직접 걸어보고 싶은 그런 매력이 있는, 세상에 하나뿐인 숲 말이지요. 훗날 우리 각자의 숲은 어떤 모습일까요? 기대감과 함께 부족한 글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에 도움을 준 컨텐츠입니다.
- 『AI시대 사람의 조건 휴탈리티』 박정열 저, 한국경제신문
- 라이프 스타일 매거진 컨셉진 (www.conceptzine.co.kr)
- 일상을 아름답게 하다, 컨셉진 편집장 김경희 인터뷰 (유튜브 채널 아트엠 콘서트 https://youtu.be/T24kkDiR0O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