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엄마와 시엄마는 아주 다른 사람들이다. 그녀들은 배경, 성격, 지향점, 살아온 방식 뭐 하나 일치하는 것이 없다.
유일하게 같은 것이 있다면 '여자가 일을 한다는 건 힘들고 불행한 것이다. 남자 돈 쓰며 사는 여자가 행복한 여자다'라는 신념이다. 그리고 그 신념을 그분들의 딸이자 며느리인 나에게 주입시켰다는 것이다.
재밌는 건 두 분 다 내가 아는 가장 능력 있는 분들이고 자신의 힘으로 일가를 이루신 분이라는 것.
시어머님은 본인의 손맛으로 한때 그 지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유명 맛집을 일구셨다. 어머님의 손끝에서 나온 돈으로 자식들은 서울로 영국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자녀들은 이걸 해서 내가 뭐 먹고살지에 대한 고민 없이, 정말 하고 싶은 전공, 인문학적인 소양을 쌓으며 지식을 탐구할 수 있었다.
아버님은 어머님의 손맛에서 나온 자산을 그 지역 각종재단법인 사단법인 및 무슨무슨 협회 같은 단체에 후원하시며 무슨무슨 협회장 단체장이 되신 후 정치에 도전하셨다. 어머님은 정치를 하시겠다는 아버님의 가장 큰 후원자가 돼서 정치자금을 대셨다. The winner takes it all의 선거판에서 져서 모든 걸 다 가져간 승자에게 모든 걸 잃고 심지어 선거기간 공정선거법위반으로 상대방에게 소송까지 당했던 그 어려운 순간을 수습해 내고 아버님을 끝까지 지켜주신 건 결국 어머님이었다.
엄마는 맞벌이를 하며 삼 남매를 키우면서도 요즘 사람들이 추구하는 N잡러처럼 그때부터 끝없이 파이프라인을 창출하셨다. 수익의 대부분은 소비하지 않고 농협수협신협 같은 협동조합에 저축하셔서 지금은 신협 VIP이시다. 아빠는 자식들의 성취는 당연한 거지만 흔들리거나 성적이 떨어지는 건 자식 교육 잘못시킨 엄마 탓이라 했다. 자녀 교육뿐만 아니라 성장과정에 무관심한 아빠의 빈자리를 크게 못 느끼고 우리가 성장한 건 다 엄마의 노력 덕분이다.
엄마는 딸들에게 취업 잘되는 전공을 선택하게 하셨지만 막상 딸들이 어린 손주들을 뒤로한 채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비극으로 받아들였다. 딸들을 이 어려운 세상을 헤쳐나가기 위해 남편에게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돈을 버는 여자로 키워낸 게 자랑이 아니라 남편에게만 의지할 수 있도록 잘난 사위를 못 얻은 게 한이였다.
애를 둘이나 낳고 키운 나에게 여전히 시집 잘 간 누구누구와 비교하며 한을 푼다.
우리 자매와 비슷한 성장과정과 배경으로 함께 자라난 이웃집 H언니. 의사와 결혼한 게 인생 최대의 업적이 된 H언니와 아직도 비교하며 그 언니는 얼마나 팔자가 좋은지를 읊조린다. 심지어 H언니는 의사를 만났는데 나는 못 만난게 애들 교육 잘못시킨 엄마 탓 이라며 아빠는 엄마를 공격했다. 엄마가 또 아빠에게 혼났다고 나에게 하소연을 할 때는 대체 누구를 설득해야 이 역동이 해결될까 고민하기도 했다. 엄마를?아빠를?
나는 행복하다. 여자가 일하는 게 불쌍하거나 불행한 게 아니다.
내 남편이 의사가 아니라 내 남편인 게 난 좋다. 나는 남자덕에 사는 팔자가 좋은 팔자가 아니라 생각한다.
나는 내 팔자가 좋다. 내가 내 팔자를 단정히 단정히 펴내려 가서 팔자 피고 사는 지금이 좋다.
그리고 남편과 상관없이 능력과 힘을 쥐고 세상을 스스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일이다.
이 사실을 아빠에게 설명해야 하나 엄마에게 설명해야 하나?
딸을 좋은데 시집보내지 못하고 대단한 사위를 얻지 못했다는 부모의 회한은 부모의 한으로 남을뿐. 이제 그 사실은 나의 행복과는 무관하다. 나는 남편을 통해서 결혼을 통해서 행복을 찾지 않아도 행복하다.
시어머니는 또 어떠한가? 며느리인 내가 일을 한다 했을 때 네까짓 게 벌면 얼마나 번다고 밖으로 나돌 궁리 하냐고 폭언을 했다. 그저 내 말 잘 듣고 애나 잘 키우면 내가 다 알아서 잘 먹고 잘살게 해 줄 건데 시어머니 말은 안 듣고 지 잘난줄만 안다고 신경질을 부렸다. 늘 자신의 성취를 과시하고 싶어하셨다. 화려한 것을 사들이고 주변사람들에게 돈을 뿌리며 사람들을 통제하고 조종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며느리는 돈으로도 조종할 수 없다는 걸 알자 네 까짓게 그래봤자 내 며느리일 뿐이라며 폭팔하셨다. 나는 어머님이 그렇게 돈으로 나를 조종하려 하지 않아도 그분이 대단한 여성이란걸 이해하고 그녀의 강인한 생활력과 활력을 존중하고 있는데 그녀는 그런 존중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어떻게든 나를 굴복시키고 싶어했다. 그녀에게 나이 어린 여성은 그저 뭘 모르고 그저 기대서 살아야하며 그저 자신에게 굴복해야 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남편과 아들에게는 늘 관대했다. 아버님이 권력욕을 가지고 정치를 하겠다며 어머님이 이룬 자산을 선거자금으로 써버려도, 남자는 야심이 있어야 한다고 두둔해 주셨다.
내 남편이 사업장을 열었다가 폐업을 했을때도, 부인 몰래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써도 어머님은 속상해 하는 나에게 남자가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으니 그런걸로 남편 무시하지 말라며 나를 단속 했다. 심지어 둘째 아들부부가 어머님의 건물을 판 돈을 증여받고는 연락을 끊었다 그 돈을 다 탕진하고 다시 돌아 왔을때 어머님은 용서하고 받아 들이셨다. 그런 관대한 어머님은 왜 나에겐 그리 박하셨을까? 동서는 가산을 탕진하더라도 돌아와서 다시 조용히 전을 뒤집고 명절노동을 한다면 용서하시고 받아 들이셨으면서 명절 노동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나는 세상 가장 못되먹은 며느리로 낙인찍혀 어머님의 응축된 회한과 원망을 뒤집어쓴 욕받이로 전락했다. 화를 내야 할 상대에게 가지 못한 어머님의 화는 나에게로 흘러들었다. 그놈의 전이 뭐라고.
어머님 식당에서 일하는 여사님들은 그 여자들 혹은 저 여자들이라고 지칭했지만 설비를 봐주고 기계 수리를 해주며 일당을 받는 핸디맨 아저씨를 지칭할때는 이름을 불러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들을 사랑했고 사랑한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사실은 사랑이란걸 알기까지 수많은 괴로움의 시간을 보냈다.
그녀들은 더 강한 자들은 남성이라고 여겨지던 세상에서 어떻게든 자기 자리를 마련한 사람이였다. 남성들이 더 강한 존재라고 배웠지만 막상 자기 남자는 약해서 자신이 그들을 보살피고 있음 에도 현실을 외면하고 자가당착에 빠져살았다. 남자덕에 사는게 제일이라 여겼기에 자신이 자기 남성을 돌보고 있음에도 그 남성덕에 산다고 여기는 그 불쌍한 자가당착.
그런데 더 어리고 약한 여성이라 여겨지는 존재가 자신들 처럼 살지 않고 자기힘으로 자기 인생만 살아가려는 것을 보고 자신의 인생이 부정당한다고 여겨졌을지도. 그래서 애써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이 깨닳음을 얻자 그녀들을 용서하고 진심으로 이해했다.
두 분 여성들께 강물을 거슬러 헤엄치는 저 오리들을 보여드리고 싶다. 사실 당신들 두 분이 제일 저 오리처럼 살지 않았냐고, 지금보다 더 여성인권 의식이 없던 시대, 남편덕에 사는 게 제일 큰 행복이라 배워온 두 분이 직접 저 오리들처럼 힘들게, 그러나 대단히 멋지게. 남편덕 없이도 살아오시지 않으셨냐고.
얼마나 물속에서 다리를 휘저었는지 그 헤엄친 자국이 이 넓은 강에 여전히 V자 모양으로 선명히 남도록 차가운 겨울강을 흔들어 깨우고 있지 않느냐고.
당신들은 특별하고 대단한 여성이셨습니다. 그 시절 따뜻한 집에서 남자가 벌어오는 돈으로 사는 여자들이 보편적이라는 인식속에서도 당신들은 차가운 세상에 나가서 돈을 벌었습니다. 그게 얼마나 대단하고 고마운 일인지도 모르고 그저 노동을 폄하하는 시선들 속에서 아프셨을 수도 있지요. 당신들은 특별하고 대단한 사람들 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은 남편에게 돌리는게 이치에 맞으니 트로피를 받아도 남자가 받아야 한다며 뒤로 물러나셨구요. 그러나 이제 그러지 마세요. 제발 다른 여성을 돌아보소서. 더이상 당신들 다음 세대에게 남자덕으로 사는게 구원이다, 여자가 벌어봤자 얼마나 버냐 같이 스스로를 아프게했던 화살을 그대로 쏘지 마세요. 당신들은 그 자신만으로 힘이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 힘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감사함을 표하지 않고 당위성만 주장한다면 그 사람들이 잘못입니다. 트로피를 쟁취하기 위한 노력은 아름다운 것이고 피나는 노력을 한 본인에게 그 상이 주어져야 합니다.
당신들 자신뿐만 아니라 당신들 딸이나 며느리는 이제 누군가의 입맞춤을 기다리며 잠든 공주님이 아니에요.그걸 우리는 전부 다 깨우쳤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당신들은 아들, 남편, 남자라는 존재가 구원을 가져다 준다는 미망에서 깨어나셔도 됩니다. 공주를 구원 서사라는 긴 잠에 빠트린건 저주를 건 마녀가 아닙니다. 애초부터 마녀는 없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