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가(勞動歌)
대학교 조별활동에 대한 영상을 보다 보면 별 희한한 빌런들을 볼 수 있다. 활동을 탈주해 버리는 빌런부터 아프다고 발표를 펑크 내는 빌런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막상 나의 대학시절에 조별과제를 수행한 기억을 보면 그런 빌런들은 거의 없었다. 국사학과였지만 국사에 관심 없던 내가 오히려 과 생활을 열심히 하던 조원들의 도움을 받았던 기억이 더 많다. 물론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열심히 조별과제를 수행했다.
회사생활도 끊임없는 조별활동의 연속이었다. 회사에서 주어지는 대부분의 과제는 혼자 진행할 수 없고 다른 구성원, 팀 혹은 외부 업체와 협업 속에서 완수할 수 있었다. 그래서 회사에서는 직원을 뽑을 때 협업능력을 핵심적인 역량으로 본다. 그런데 이렇게 협업능력이 높은 사람들이 모인 회사에서 나는 오히려 유튜브에서 보던 수많은 빌런들을 만났다. 직장 동료끼리의 팀 과제에서는 늘 "독박"을 쓰는 희생자가 나온다. 직장에서의 부서 간의 협업도 유쾌하지는 않다. 모든 부서가 서로 자기 것이 아니라고 하고 일을 피해 가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문제의 해결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문제의 회피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행동한다.
도대체 왜 회사에서 일어나는 조별활동은 대부분 유쾌하지 않을까? 부장, 차장, 과장이라는 직급들로 프리라이딩을 합법화시킨 구조가 문제일 수 있고, 채용과정에서 협업 능력이 높다고 연기를 잘 한 사람들이 모여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큰 원인은 회사라는 구조가 "내 것"들을 정해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회사는 재무팀은 재무상태표의 작성, IT팀은 프로그램 개발이라는 업무 등 부서마다 사람마다 명확하게 업무를 나누어 놓았다. 따라서 기존에 하고 있는 일들, 정형화된 일들에 있어서는 네 것, 내 것이 명확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문제상황, 새로운 상황의 경우 대부분 누구의 것이라고 명확하게 나눌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한다.
"코딩의 오류 때문에 회계 계산값이 잘못 나왔다."는 문제는 누가 먼저 원인을 파악하고, 누가 주도를 해서 해결을 해야 하는가? 코딩의 오류라는 말만 놓고 보면 IT 부서 혼자서 처리해야 할 일 일 것 같다. 하지만 회계값의 검증은 재무 부서에서 해야 하는 일이고, 코딩의 오류도 애초에 재무 부서에서 잘못된 요건을 줬기 때문일 수도 있다.
회사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면 대부분의 조직에서는 서로 자기의 일이 아니라고 책임을 미루고 해결의 골든타임을 놓쳐버린다. 상황이 곪아터지기 전에 사람들은 어떤 희생자를 찾고, 누군가는 빌런이 되어 그 일을 희생자에게 던져버린다. 그리고 나머지는 키티 제노비스 사건의 목격자들 마냥 자기에게 더 이상 아무런 피해가 안 일어나길 바라면서 가만히 상황이 끝나기를 숨죽이고 있는다. 업무 분장이라는 허상이 회사가 끊임없이 마주치는 새로운 상황 속에서 희생자와 빌런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