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신세 많이 졌습니다...
Prologue.
2025년 1월 1일. 본가에서 엄마표 떡국을 먹고 클라이밍을 하러 가서 크게 다쳤다. 조금 특이한 위치에 있던 문제를 풀러 올라가서 2m에서 추락. 왼쪽 발목으로 착지하면서 '뚜둑' 하는 소리가 났고 119 구급대원분들과 함께 암장을 나왔다. 앰뷸런스에 실려간 병원에서 X-레이를 찍고 수술 밖에는 답이 없다는 답을 들은 뒤 겸허히 입원수속을 밟았다. 1월 2일 오후 1시쯤 수술실에 들어갔고, 내 수술을 담당하신 선생님으로부터 "부러질 수 있는 뼈는 다 부러졌더라. 어쨌든 수술은 잘 됐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렇게 10일을 병원에 입원해 누워만 있다가 1월 11일 토요일에 퇴원했다. 그 사이 생전 걸려본 적 없는 A형 독감까지 걸려 혼자 2인실에 격리되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 모든 일들이 새해의 문을 열자마자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삶은 계속되어야 하기에 7일의 연차 사용을 끝으로 다시 회사에 출근해야 했다.
이 일기는 적어도 2달간은 꼼짝없이 왼쪽 발을 쓸 수 없게 된 내가 병원을 나와 다시 일상을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나 신세를 지고 마는 하루의 기록이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집, 나오자마자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집에 산다는 이유로 출퇴근 자체가 고행이 되어버린 나의 매일의 모험일지다. 신세 지는 걸 그렇게나 싫어하는 나였지만 이젠 누군가의 호의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렇게 신세 지는 법을 배워간다. 졸지에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져버린 내게 기꺼이 배려와 호의를 베풀어주신 분들을 기억하고 싶어 기록하려 한다. 이 글은 깁스를 푸는 날 끝을 맺을 것이다.
2025년 1월 14일 화요일.
목발 짚고 출근 2일 차
둘째 날 아침부턴 같은 교회에 다니는 M언니가 라이딩을 해주기로 했다. 어제 택시가 안 잡혀 힘겹게 출근하고나니 막막한 마음에 며칠 전 라이딩을 제안해 준 언니에게 연락을 했다. 그렇게 언니와 만나기로 한 시간에 맞춰 빌라를 내려오는데 우당탕탕 소리에 아랫집 언니가 문을 열고 나와 나의 출근길 안위를 살핀다. 어제 한바탕 눈과 비가 섞여 내린 바람에 길 곳곳이 미끄럽다는 J언니의 연락을 받은 상태, 오늘 출근길은 정말 난항이 예상된다.
언니가 앞장서서 미끄러운 현관 바닥을 살피고 빌라 앞 철문을 열어서 턱이 없는 쪽으로 갈 수 있게 해 준 덕분에 겨우 나와 내리막길을 내려왔다. 그리고 언니는 다시 집으로 들어갔는데, 하아, 휠체어 위에 핸드폰을 놓고 나왔다 ㅜ 다시 오르막길을 올라가 빌라 입구에서 언니를 불러본다. "언니. 언니"
언니가 대신 우리집에 들어가 핸드폰을 가져다주었다. 다시 올라갈 생각을 하면 진짜 아찔했는데 언니 없었으면 핸드폰 없이 출근할 뻔 했다.
목발생활은 같은 일도 2배로 시간이 더 걸린다. 덕분에 평소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게 됐고 부지런히 준비를 하다 보면 시간이 여유롭다. M언니와의 약속 시간이 좀 더 남았길래 언니가 조금이라도 덜 올라오도록 내가 더 내려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미끄러운 길을 걷기 시작했다. 조심한다고 했지만 얼마 못 가 다친 왼쪽 다리 쪽으로 슬라이딩해 넘어졌다. 길이 이렇게나 미끄러울 줄이야... 정신을 차려 보니 정상적인 사람들도 모두 뒤뚱 뒤뚱 걷고 있다.
너무 놀라긴 했지만 정신을 다잡고 목발을 다시 짚어 몸을 일으킨다. (나중에 집에 와서 소독하려고 보니 멍이 들고 잔뜩 부어있던 내 발. 주인 잘못 만나서 너무 고생한다)
M언니 차를 타고 회사 건물 옆쪽으로 하차했다. 그런데 얼마나 미끄러운지 내리자마자 또 넘어질 뻔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정식 명칭을 알게 된 '고종즉위 40년 칭경기념비'를 감싼 울타리를 잡고 진짜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걸었다. 다행히 중간부터는 염화칼슘이 뿌려져 있어 그 길을 따라 겨우 회사 안으로 들어왔다. 사고 난 이후로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는데 오늘은 진짜 눈물 찔끔할 뻔했다...!
출근만으로 진을 잔뜩 빼고 나니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다. 나름 다시 회의도 하고 문서도 쓰고, 그렇게 하루가 갔다.
퇴근 시간에 맞춰 치킨을 주문했다. 아랫집 언니와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기 때문. 다행히 오늘도 택시가 잘 잡혔다. 퇴근길은 미끄러웠던 흔적 없이 잘 말라있었고 아침보다는 훨씬 더 쉬운 저녁이 될 것 같았다.
또 한 번 심호흡을 하고 빌라 입구까지 도착, 이제 계단만 오르면 끝이다! 온 힘을 다해 오르막길을 올라와서 그런지 유독 힘든 계단 오르기, 홀로 힘겹게 사투를 버리고 있는데 내가 시킨 치킨을 배달하러 오신 기사님께서 나를 보시고는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도와드려도 될까요?” 하신다.
"아이고 전혀 실례 아니에요. 도와주시면 전 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내가 넘어지지 않게 지켜만 봐달라고 부탁드렸는데 목발 하나 들어주시다가 결국 2층 앞 계단에서는 아예 팔을 잡으라고 하시고는 부축해서 올려주셨다. 계단 6-7개 올라가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나. 다치기 전에는 꿈에도 몰랐다. 배달기사님 아니었으면 얼마나 진땀을 뺐을까.
다리 하나가 고장 나니 집 앞에 쌓인 택배 하나 주워서 집 안으로 들고 들어가는 것도 힘들다. 그런데 목발생활 하는데 필요한 게 어찌나 많은지 오늘도 문 밖에 몇 개의 택배상자가 널려있다. 기사님께서 나의 맘을 어찌 아셨는지 택배상자도 다 집 안으로 들어놔 주셨다. 현관문을 여니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날 기다리고 있는 휠체어, 휠체어에 몸을 맡기고 기사님께 그저 감사합니다만 수차례 반복했다. 활짝 웃으며 얼른 나으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날개 없는 천사... 지금 생각해도 너무 감사드린다.
치킨과 함께 먹을 떡볶이와 과일을 준비해 온 아랫집 언니랑 한창 근황토크를 하고 거실 한편에 모여있는 나의 상처 소독 재료들을 보여줬다. 잊고 있었는데 언니는 간호사 출신으로, 현재도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언니 덕분에 포비돈도 그냥 쓰면 안 된다는 걸 알게 되고, 언니 집에 있던 멸균 면봉을 갖다 주셔서 거기에 도포해 상처부위를 소독했다. 아침에 넘어져서인지 상태가 안 좋은 다리를 보며 속상했지만 그래도 꿋꿋이, 꼼꼼히 소독을 마쳤다.
오늘도 무사히 집에 돌아왔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날 도와주시는 분들이 없었다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일이다. 다치고 나니 인류애가 충만해진다. 세상은 아직 따뜻하다. 내 몸이 다시 건강해지면 나도 많은 이들에게 날개 없는 천사가 되어주고 싶다.
오늘도 신세 많이 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