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보니 '완전 럭키비키잖아!'
Prologue.
2025년 1월 1일. 본가에서 엄마표 떡국을 먹고 클라이밍을 하러 가서 크게 다쳤다. 조금 특이한 위치에 있던 문제를 풀러 올라가서 2m에서 추락. 왼쪽 발목으로 착지하면서 '뚜둑' 하는 소리가 났고 119 구급대원분들과 함께 암장을 나왔다. 앰뷸런스에 실려간 병원에서 X-레이를 찍고 수술 밖에는 답이 없다는 답을 들은 뒤 겸허히 입원수속을 밟았다. 1월 2일 오후 1시쯤 수술실에 들어갔고, 내 수술을 담당하신 선생님으로부터 "부러질 수 있는 뼈는 다 부러졌더라. 어쨌든 수술은 잘 됐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렇게 10일을 병원에 입원해 누워만 있다가 1월 11일 토요일에 퇴원했다. 그 사이 생전 걸려본 적 없는 A형 독감까지 걸려 혼자 2인실에 격리되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 모든 일들이 새해의 문을 열자마자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삶은 계속되어야 하기에 7일의 연차 사용을 끝으로 다시 회사에 출근해야 했다.
이 일기는 적어도 2달간은 꼼짝없이 왼쪽 발을 쓸 수 없게 된 내가 병원을 나와 다시 일상을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나 신세를 지고 마는 하루의 기록이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집, 나오자마자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집에 산다는 이유로 출퇴근 자체가 고행이 되어버린 나의 매일의 모험일지다. 신세 지는 걸 그렇게나 싫어하는 나였지만 이젠 누군가의 호의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렇게 신세 지는 법을 배워간다. 졸지에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져버린 내게 기꺼이 배려와 호의를 베풀어주신 분들을 기억하고 싶어 기록하려 한다. 이 글은 깁스를 푸는 날 끝을 맺을 것이다.
2025년 1월 16일 목요일
목발 짚고 출근 4일 차
다치고 나서 좋은 점이 있다면 매일 밤, 다음날 출근을 위해 가방을 '미리' 싸두는 의식을 부지런히 행한다는 것이다. 다치기 전엔 8시에 겨우겨우 일어나 허겁지겁 채비를 하고 출근시간 30분 전에 집 밖을 나섰다면 이제는 전날 밤 미리 다음날을 위한 대부분의 준비를 마친 덕분에 불편한 몸으로도 여유로운 아침 시간을 보낸다.
침대에 눕기 전 부엌으로 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아침에 가서 먹을 과일을 씻는다. 내가 좋아하는 사과 한 알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통에 담고 올리브유까지 뿌리면 완성! 점심에 먹을 샐러드도 챙겨서 커다란 지퍼백에 차곡차곡 쌓으면 되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각종 과일과 간식거리까지 모두 담은 나를 위한 지퍼백이 완성되면 매일 집 앞까지 데리러 와주는 M언니를 위한 작은 간식백도 만든다. 매일 아침 차 안에서 주거니 받거니 각자가 챙겨 온 간식을 교환하는데 서로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매일 무언가 건네는 게 새로운 반찬을 만들면 꼭 옆집과 나눠먹던 옛날 동네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출근 4일 차인 오늘 아침도 언니는 주섬주섬 먹을거리들을 꺼내 내게 건넸는데 바나나 하나, 깨끗하게 씻은 체리들, 손흥민이 크게 프린트되어 있는 건강음료까지 푸짐하다. 언니가 챙겨주는 것들만으로도 아침 약 먹기 전 식사 한 끼는 뚝딱이다.
M언니를 만나기 전까지 나를 배웅해 주는 아랫집 언니는 출근길 내 백팩 한쪽 주머니에 빨간 소독액이 묻어있는 면봉을 한 움큼 넣어주었다. 언니가 일하는 병원에서 하나에 300원씩이면 산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게 싸다고...? 요즘 300원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다. 내게 돈을 안 받기 위해서 일부러 하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돈은 드려도 안 받으실 것 같아서 간식거리나 생활용품들을 드린다. 해주는 것도 없는데 자꾸 뭘 챙긴다는 언니들의 말에 말문이 막힌다. 나는 받는 게 너무 많으니까!
오늘도 다치기 전보다 훨씬 더 일찍 회사에 도착했다. 8시 30분, 예전엔 집에서 출발하던 시간인데 요샌 길이 안 막히면 이것보다 빨리 도착하기도 한다. 집이 가까운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새해가 되기 직전, 팀 간 자리 이동이 있었다. 너무 안쪽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 같아서 처음엔 다 꺼려했는데 막상 와보니 전보다 사이사이 공간이 넓다. 그리고 회의실도 바로 앞이다. 덕분에 넓은 통로 사이로 의자를 끌고 다니는 것도 부담이 없고 나만의 작은 식당이 되어버린 회의실에 가는 것도 금방이다. 이제 보니 '완전 럭키비키잖아!' 하게 되는 것들이 어찌나 많은지.
오늘도 나만의 작은 식당인 소회의실에서 어젯밤 싸둔 지퍼백을 꺼낸다. 며칠째 점심을 샐러드로 먹으니 생각보다 성에 안 차서 다음 주부턴 도시락을 싸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주문하면 내일 집 앞에 새로운 도시락 통과 수저통이 도착해 있을 것이다. 로켓배송 시대에 산다는 건 새삼 어마어마하게 편하고 좋은 것이다. 가까운 편의점 하나 가기에도 쉽지 않은 지금 상황에서 손가락 하나로 무엇이든 살 수 있는 세상이 온 것에 감사할 뿐이다.
그렇게 오늘도 무사히 출근을 했다.
이제 남은 미션은 안 넘어지고 잘 퇴근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