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발 짚고 출근 6일 차

다시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출근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by Heather

Prologue.

2025년 1월 1일. 본가에서 엄마표 떡국을 먹고 클라이밍을 하러 가서 크게 다쳤다. 조금 특이한 위치에 있던 문제를 풀러 올라가서 2m에서 추락. 왼쪽 발목으로 착지하면서 '뚜둑' 하는 소리가 났고 119 구급대원분들과 함께 암장을 나왔다. 앰뷸런스에 실려간 병원에서 X-레이를 찍고 수술 밖에는 답이 없다는 답을 들은 뒤 겸허히 입원수속을 밟았다. 1월 2일 오후 1시쯤 수술실에 들어갔고, 내 수술을 담당하신 선생님으로부터 "부러질 수 있는 뼈는 다 부러졌더라. 어쨌든 수술은 잘 됐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렇게 10일을 병원에 입원해 누워만 있다가 1월 11일 토요일에 퇴원했다. 그 사이 생전 걸려본 적 없는 A형 독감까지 걸려 혼자 2인실에 격리되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 모든 일들이 새해의 문을 열자마자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삶은 계속되어야 하기에 7일의 연차 사용을 끝으로 다시 회사에 출근해야 했다.


이 일기는 적어도 2달간은 꼼짝없이 왼쪽 발을 쓸 수 없게 된 내가 병원을 나와 다시 일상을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나 신세를 지고 마는 하루의 기록이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집, 나오자마자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집에 산다는 이유로 출퇴근 자체가 고행이 되어버린 나의 매일의 모험일지다. 신세 지는 걸 그렇게나 싫어하는 나였지만 이젠 누군가의 호의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렇게 신세 지는 법을 배워간다. 졸지에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져버린 내게 기꺼이 배려와 호의를 베풀어주신 분들을 기억하고 싶어 기록하려 한다. 이 글은 깁스를 푸는 날 끝을 맺을 것이다.


2025년 1월 20일 월요일.

목발 짚고 출근 6일 차


5일을 꽉 채워 출근하고 맞이한 주말엔 쉬느라 바빴다. 금요일밤 친한 동생이 보내준 배달의 민족 5만 원 쿠폰을 가슴속에 꼭 품고 잠에 들었고, 일어나자마자 샌드위치와 커피를 시켜 먹었다. 병원에 누워있을 땐 마치 단 한 번도 좋아했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커피가 일절 안 당겼는데 집에 돌아오니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커피를 찾게 된다.


목발 생활을 하면 그동안 해왔던 '한 손에 커피 들고 출근하기' 같은 건 완전한 사치가 된다. 더울 땐 투명한 얼음 가득 든 커피를 쪽쪽 빨며 출근했고, 추울 땐 따뜻한 커피를 담은 테이크아웃잔을 핫팩 삼아 출근했는데 이젠 양손을 모두 목발에 내어주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출근을 앞두고는 나의 커피 생활에 대한 고민이 진지하게 앞섰고, 마치 전투식량을 준비하듯 일명 최화정 커피로 유명한 심플리 커피 한 박스를 주문했다. '뚜껑이 달린 커피' 중에선 이 커피가 그나마 내 입맛을 맞춰줄 것 같았고 첫 주 출근은 매일 이 커피와 함께 했다. 그리고 두 번째 출근 주를 준비하면서 이제 좀 새로운 커피를 먹어보고 싶어 배달앱을 켜고 바닐라라테를 뚜껑 있는 병에 담아 파는 곳을 찾았다. 아메리카노만 먹다 보니 아바라가 너무 당기는 것, 자연스러운 거잖아요?



일요일 밤 집 앞에 도착한 커피 3병. 디카페인 바닐라라테와 일반 바닐라라테를 주문했는데 얼음 넣은 바닐라라테가 이렇게 맛있는 거였나 새삼 놀라고, 이 커피와 함께라면 목발 짚고 출근도 두렵지 않을 것 같단 생각으로 월요일을 맞이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날 데리러 와준 M언니 덕에 이른 출근을 완료했다. 지난주보다는 조금 더 수월한 한 주가 되지 않을까 기대하며 컴퓨터를 켠다. 밤 사이 내 메일함에 가득 도착한 각종 뉴스레터들을 차례대로 읽으며 월요일 출근 워밍업을 시작했는데 M언니의 카톡이 도착했다.



추운 겨울 이불속 단잠도 포기하고 아침 시간을 나를 위해 내어 주는 언니를 생각하며 전한 바닐라라테, 그냥 주기 아쉬워서 납작한 병을 편지지 삼아 몇 자 적었는데 뒤늦게 그걸 본 언니가 고맙다며 보내온 카톡이었다. 별 거 아닌 거지만 이렇게 소소한 방법으로라도 마음을 전하는 게 난 참 좋다. 이번 주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도움을 받을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지금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고마운 사람들에게 충분히 맘을 전하고 싶다.


발 한쪽으로 산다는 건 참으로 위태롭다. (안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화재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무겁게 만들어져야만 하는 문은 현재 나의 에너지를 가장 많이 뺏어가는 요소 중 하나다. 회사 로비 문도, 화장실문도 어느 것 하나 쉽게 열리는 게 없다. 오른발만을 땅에 지탱한 채 양쪽 겨드랑이로 목발을 끼고 문을 열기 위해 상체에 온 힘을 싣고 있는 나 스스로를 보고 있노라면 흡사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 같다. 그 때문인지 이제는 내가 문 근처에만 와도 나를 도우려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고, 나는 그들에게 기꺼이 도움을 받겠다는 표정으로 하던 싸움을 멈춘다.


그렇게 또 신세지며 하루를 살았다. 문 하나 여는 게 이렇게나 힘이 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나는 연약한 누군가를 얼마나 도우며 살아왔는지 되짚어 보게 된다. 부러진 다리가 붙고, 다시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출근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동안 흐린 눈을 한 채 지나쳤을 어떤 이의 고된 싸움에 기꺼이 동참하고 싶다. 그건 겨우 대신 문을 열어주는 일, 잠깐 짐을 들어주는 일, 자리를 비켜주는 일 정도일 확률이 높다.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하나도 당연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돼서 감사하다. 새로운 한 주도 감사로 채워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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