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마케터들에게 요구되는 역량
광고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광고를 전공했다. 하지만 광고회사 근처에는 가지도 못했다. 광고홍보학부에 입학해서 만난 개성 넘치는 동기들을 보며 '난 광고인이 되기엔 너무 평범해'라고 수없이 되뇌었고, 그 덕분에 광고회사는 내게 '접근금지의 영역'이자 '넘사벽의 영역'으로 남게 됐다. 그래도 광고를 전공하는 게 좋았다. 고민, 또 고민해서 뭔가 해답을 찾는 과정이 짜릿하고 보람차니까.
1학년 필수 교양과목 중 '말과 글'이라는 수업이 있었다. 어떤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면서 말하기, 하나의 주제를 정해서 글쓰기를 배웠던 수업. 사실, 그 외에는 별로 기억나는 게 없지만 학교 다니면서 유일하게 C+을 받았던 수업이라는 건 확실히 기억한다. 그땐 동기들과 한 마음 한 뜻으로 "말과 글 수업 진짜 듣기 싫어.” 소릴 자주 했었는데 이제는 왜 이 수업이 1학년 필수 교양 과목이었는지 알 것 같다.
마케팅은 어느 업계에서, 어떤 회사에서, 어떤 팀에서 일하느냐에 따라 하는 업무가 조금씩 다르다. 나만 해도 이전 회사와 지금 회사가 동일하게 패션회사지만 하는 일은 완전히 다르다.
하는 일은 다르지만 모든 마케터들에게 요구되는 역량이 있다면 그건 바로 '말과 글'이 아닐까 싶다. 마케팅은 '고객 커뮤니케이션'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으니, 업의 존재 이유 자체가 '말과 글'로 성립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일을 하는 중간에도 수시로 브랜드 공식 페이스북 메시지를 확인하고 답변을 단다. 별 것 아닌 일 같지만 정말 중요한 업무다)
회사 내부에서는 여러 유관부서와 밀접하게 협업해야 하고, 컬래버레이션이나 제휴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타사와의 커뮤니케이션이 필수니까. 나 역시 하루에도 몇 번씩 자사몰 담당자와 고객센터 담당자, 담당하는 제품의 MD들과 대화하면서 일하고 있다. 콜라보나 제휴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회사의 마케터들과의 미팅과 통화, 이메일 커뮤니케이션도 필수다.
홍보대행사에 처음 입사했을 때, 내가 통화하는 소리까지 귀담아듣다가 피드백을 주던 선배가 있다. 선배는 이메일 쓰는 법 까지 친절하게 알려줬는데 처음엔 '이런 것까지 선배가 하는 대로 따라 해야 되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배가 내게 가르쳐 주려던 건 자신의 스타일이 아니라 홍보담당자로서의 '말하는 애티튜드'와 '이메일로 실수하지 않는 법'이었던 것 같다.
가끔 회사에 새로 들어온 신입(꼭 신입들만은 아니지만 특히) 이 보낸 메일을 읽다가 화가 나거나 황당할 때가 있다. 다짜고짜 필요한 자료를 내놓으라고 하는 메일, 당장 30분 뒤에 미팅이 있으니 회의실로 오라는 메일, 말하고자 하는 요지가 보이지 않게 장황하고 횡설수설하는 메일... 그럴 땐 이 메일에 나도 똑같이 회신을 해야 하나 싶다. 무례하고, 횡설수설하고, 황당하게.
이메일을 쓸 때 중요한 건, 메일을 쓰는 내가 아니라 메일을 읽는 사람이다. 그래서 늘 내가 쓴 이메일을 여러 번 읽고 여러 번 수정한다. 제목도 중요하다. 내가 보낸 메일이 아니어도 늘 많은 메일을 받을 것이고, 바쁜 업무에 치여 내가 보낸 메일을 대충 읽고 지나쳐 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제목에 메일의 요지가 들어가는 게 좋다. 메일 내용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로, 하고자 하는 말이 명확하게 보여야 한다.
마케터에게 글쓰기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일을 하면서 네이밍을 하거나 카피라이팅을 해야 하는 순간을 자주 만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올해 내가 지은 네이밍이 실제 제품명이 된 경우도 꽤 된다. 매번 전문 네이밍 업체나 광고회사에 카피라이팅을 부탁할 수 없기 때문에 마케터라면 누구나 직관적이고 임팩트 있는 이름 또는 문장을 만드는 재주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책 읽기는 물론이고 각종 활자와 친하게 지내야 한다. 잘 지은 제품명이나 광고 카피들을 읽고 리뷰하는 훈련도 필요하고.
마케터에게 말하기가 중요한 이유는, 만든 자료를 여러 부서가 모여있는 회의 석상에서 설명해야 하는 때가 많고 외부 협력사나 타사에 가서 준비한(기획한) 마케팅 계획을 발표해야 할 때가 꽤 있기 때문이다. 전 직장에서는 시장조사를 다녀온 결과를, 회장님 앞에서 발표한 적도 있었으니 직급에 상관없이 언제고 '말할 준비'를 해야 하는 것 같다. 잘 말하는 법이 뭔지 나도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왜 해야 되는지'가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
마케터는 '~~ 해서 ~~~ 해야 합니다'를 설득해야만 기획한 것이 실제로 실행/집행될 수 있기 때문에 생각에서 끝나지 않고 행동하려면 말하기의 과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전 직장에서는 마케팅 예산 집행하는 게 정말 어려웠어서 실행하는 것보다 설득하는 게 더 힘들었다. '이거 정말 해야 되는데. 이게 답이에요!'라고 생각해도 상대를 납득시키지 못하면 끝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늘 기획하는 것보다 설득하기 위한 자료를 만드는 시간이 배는 더 걸렸던 것 같다. 내용이 없는데 말만 번지르르하면 안 되니까.
마케팅팀 입사를 꿈꾸는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는 게 있다. 회사 안팎에서 만난 예비 마케터들에게 받은 질문도 대부분 이거였다.
"마케팅팀에 입사하려면 무얼 준비해야 할까요?"
이런 질문을 하는 예비 마케터들에게 반대로 질문하면 대부분 영어공부를 하는 중이라고 답한다. 토익이나 토플, OPIC 점수가 없으면 지원서조차 낼 수 없는 곳이 많으니까 말이다. 물론 영어공부는 무조건 필수 - 근데 난 왜 안 하고 있냐... - 지만, 영어와 함께 '말과 글'을 공부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마케팅팀에 들어와서 바로 하게 되는 일은 영어보다 오늘 회의 때 나온 이야기를 글로 정리하기(회의록 작성), 내 생각을 정리해서 말하기(팀/부서 회의 때 각자의 아이디어 공유), 요청할 내용들을 타 부서에 메일로 보내기와 같은 것들이니까.
생각해보면 1학년 때 C+을 받아 내 발목을 잡았던 '말과 글' 수업을 한번 더 들었던 건 행운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A+을 받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생각해보면 말과 글은 꼭 마케터에게만 필요한 역량은 아니다. 모든 직장인들에게 필요한 것이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계속 중요한 것. 한 번에 늘지는 않으나 매일 조금씩 훈련하면 분명히 좋아지는 말과 글. 이 글을 쓰다 보니 벌써 월(헬) 요일이 됐다. 다시 말과 글의 전쟁터로 나가야 하는 모든 마케터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언젠가는 나도 '잘' 말하고 '잘' 쓰는 마케터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