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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Jan 09. 2019

포기도 아주 큰 선택

하지 않을 용기가 필요한 순간도 있다.


작년 한 해를 통틀어 가장 흥미롭게 본 영화 <소공녀>. 이 영화를 만든 전고운 감독은 청룡영화상, 부일영화상, 대종상 등에서 신인감독상을 휩쓸며 재능 있는 여성영화인의 등장을 알렸다.



갈 곳 없는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삶을 초라하게 만들지 않는 여주인공 미소(이솜). 그녀의 인생을 보며 '저렇게도 살 수 있구나.'라는 걸 알았다. 위스키 한 잔과 담배 한 갑, 사랑하는 사람만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삶. 집이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이라는 그녀의 말이 허세로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마땅히 있어야 할 것들이 없는 삶을 상상해보면, 나도 미소처럼 살 수 있을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전고운 감독의 씨네 21 인터뷰를 읽다가 적어둔 문장을 다시 꺼내어본다.  


Q. 미소가 집을 나와 일용직으로 전전하는 건 적극적인 선택일 수도 있지만 기존 사회에 편입되지 않고 포기한다는 것으로도 읽힌다. 미소가 하는 선택은 어디까지로 설정했나.


포기도 아주 큰 선택인 것 같다. 나 역시 영화 일을 하는 게 힘들다고 하고 포기하면 되는데 그걸 그만둘 용기가 없더라. 한국 사회에서는 물론 포기는 패배를 의미한다. 그런데 포기가 나쁜 건 아니라고 봤다. 부모님 세대가 ‘집부터’ 갖춘다고 고집하는 것도, 현재의 젊은이들이 ‘지금부터’를 중요시하는 거 둘 다 맞다고 본다. 안 좋은 것은 그런 선택의 순간 없이 그저 휩쓸려가는 것이다. 취직할 때 되니 취직하고 결혼할 때 되니 결혼하고 그렇게 의지 없이 흘러가는 경우를 많이 봤다.


포기도 아주 큰 선택이라는 첫 문장이 정말 와 닿았다. 우리는 늘 '포기는 곧 실패'라고 배웠으니까 말이다.


브랜드가 잘 나가는 시기엔 참 많은 협업 제안이 들어온다. (2년 사이에 정말 많이 달라졌다. 그땐 직접 제안서를 써서 원하는 파트너들에게 직접 제안서를 내밀었는데 말이다.) 많은 콜라보 경험이 있는 우리 팀은 괜찮다고 판단되는 제안이 있다면 대부분 다 진행하려고 한다. 하지만 요즘처럼 많은 제안들이 들어올 땐 선택과 집중이, 포기할 건 포기하는 용기가 필요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브랜드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좋은 제안은 무조건 성공시켜야지' 하는 마음이 반, 계속되는 협업이 혹여나 좋지 않은 부작용을 낳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이 반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늘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간 될 거야.'라는 강요 섞인 메시지를 보고 들으며 자랐다. 사회 곳곳에 이런 메시지들이 글로, 소리로 퍼져있었다. 일도, 사랑도, 돈도, 꿈도 포기하면 안 된다고 배웠던 우리에게 포기가 어려운 건 당연한 결과다. 누구나 '포기하지 않고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부쩍 '하지 않을 용기', '포기를 선택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라는 인간에게 그리고 마케터라는 직업을 가진 이대리에게, 아니 이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그런 용기가 생기는 날이 온다면 좋겠다.


포기라는 선택지에 자연스럽게 동그라미를 치는 날,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길 바라며 오늘도 열심히...

일, 했습니다.


+

이 글을 쓰고 며칠이 지나서야 깨달은 것. 대한민국엔 이미 취업을, 연애를, 결혼을 나아가서는 이번 생 자체를 포기하기로 선택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그들이 결코 행복을 포기한 것은 아닐거라 믿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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