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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현수 Aug 05. 2020

펀딩으로 사면 왜 잘 안 쓰게 될까

스토리의 이면

여름에 시원하게 신으로면 좋을 것 같아 구입한 베이지색 로퍼는 아직 신발장에 그대로입니다. 두피를 스켈링해준다는 제품은 한두번 쓰다가 귀찮아서 쓰지 않고 있습니다. 스탠드를 겸한 스캐너는 아이 그림을 쉽게 스캔하려고 샀는데 배송받은 날 하루만 해보고 책상 스탠드로 쓰고 있습니다. PC를 빼고는 제가 구입한 가장 비싼 전자기기인데 말이죠. 지금 얘기한 제품들은 모두 펀딩사이트를 구매한 제품들입니다.

반면에 좀 싸게 사보겠다고 짐이 늘어나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면세점에서 어렵게 구한 가방은 삼년내내 하루도 뻐짐없이 출근용으로 잘 쓰고 있습니다. 남성복 매장을 전부 돌면서 수십번 입고 벗으며 골랐던 청바지는 사계절 내내 잘입고 있습니다. 인터넷 쇼핑몰을 뒤지고 뒤져서 적당한 가격에 알맞은 디자인의 스니커즈는 여름내내 잘 신고 다니고 있습니다. 이들 제품들은 앞서 말씀드린 펀딩으로 구입한 로퍼나 두피케어용품이나 스탠드와는 비교도 안될만큼의 사용률을 갱신중입니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저는 자발성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장바구니에 넣고 구매버튼까지 스스로 눌렀는데 무슨 소리냐구요? 펀딩 사이트의 상세 페이지가 편하게 떠먹여주는 스토리만 줄줄 받아먹다가 뭔가에 홀린 듯 구매 버튼을 누르는 것과 스스로 제품의 스토리를 발견해 가면서 발품팔아 산 제품들의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후자에 비하면 전자는 너무나 수동적인 구매행동입니다.

구입한 경로도 생각해보면 내가 필요해서 제품을 찾아봤던 게 아니라, 인터넷상에 떠돌던 펀딩사이트의 광고를 통해 구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단 한번도 자발적으로 그 펀딩사이트를 방문한 적이 없었구요. 살 게 있어서 들린 곳이 아니라, 일단 들어가서 살 게 없나하고 살피는 거였죠. 그러다가 굳이 사지 않아도 될 물건을 사게된 거구요.

스토리의 힘은 정말 대단합니다. 펀딩사이트의 엄청나게 설득력 있고 그럴듯하게 만들어진 스토리를 보고 있으면 어느샌가 결재 버튼을 누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됩니다. 몇번이나 실패한 구매경험이 있는데도 말이죠. 매력적인 스토리를 읽고 있으면 그 전의 부정적인 사실들을 금방 잊게 됩니다.

우려스러운 건 스토리의 장점을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제품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산전수전 다 겪어낸 것같은 눈물의 창업스토리와 소설 수준의 드라마틱한 기술개발 스토리를 듣고 구입한 어떤 헤어케어 제품이 생각납니다. 발싸 5년전에 썼지만 아직도 그 향과 질감이 선명하게 기억되는 글로벌 뷰티브랜드였죠. 펀딩사이트에서 구입한 제품을 쓰자 마자 알았습니다. 완벽하게 같다는걸요. 그 향을 맡자마자 느끼는 감정은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 당한 느낌까지 들더라구요. 그렇게나 진지하게 했던 얘기들이 모두 거짓이라니. 너무 많이 남아있어 버리기는 아까워 가끔 쓰고 있는데 그 때마다 그날의 감정이 떠올라 기분이 씁쓸해지곤합니다.

2,3년전만 해도 브랜드의 풀스토리를 호소력있게 풀어낸 상세 페이지들을 보면 브랜딩을 하는 입장에서는 공부할 것도 많고, 일반 소비자들의 입장에서는 너무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게 또 하나의 고정된 포맷이 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그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전문가들도 있다고 하니 말이죠. 그걸 알고 난 후로는 그 스토리들이 절대 순수하게 읽히지가 않습니다.

펀딩이라는 너무 좋은 취지가 몇몇 스토리 사기꾼으로 흐려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든 자정 작용을 통해 좋아졌으면 합니다. 아니 꼭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처음엔 저도 열열히 응원하는 팬이었으니까요. 저와같은 부정적 구매 경험자가 된 분들이 좀 더 믿고 구입할 수 있게 확인된 스토리와 검증된 품질의 펀딩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실수로 잘못 샀을 때는 돈만 조금 아깝지만 이야기에 반해 샀는데 그 게 거짓일 때는 감정을 다칩니다. 한 때 팬이 돌아서서 누구보다 무서운 안티팬이 되다는 걸 판매자 펀딩관계자들 모두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씽킹브릭
#왜펀딩으로사면잘안쓰게될까
#스토리의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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