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효율성을 높이는 일
회사 견적서를 보낼 때 엑셀이나 MS워드같은 문서 프로그램으로 만들지 않고 일일이 그래픽 프로그램으로 편집하고 있다. 만들어 놓은 틀이 있긴하지만, 프로젝트마다 성격과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보낼 때마다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가 들어간다. 일반 문서라면 십분이면 될 걸 길게는 한시간을 넘게 작성하기도 한다.
이런 미련해 보이는 수고스러움을 감수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견적서가 우리 회사의 감각을 전하는 첫번째 작업물이라는 생각때문이다. 기성 문서 프로그램으로는 아무래도 우리가 추구하는 미세한 감각까지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의도한대로 레이아웃이나 서체의 비율조정과 배치가 어렵다.
숫자만 있으면 되는 견적서에 무슨 감각이냐고 하겠지만, 다른 회사도 아닌 디자인 회사의 견적서는 좀 달라야하지 않을까. 고객들이 명조체로된 숫자와 표만으로 꽉 채워진 엑셀파일을 받아 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지 상상을 해보니 안되겠다 싶었다. 숫자만 나열된 견적이 아니라 숫자 넘어에 있는 결과물까지 예상되는 견적서면 더할 나위없겠지만, 적어도 견적서 하나가 우리의 디자인의 품질을 짐작하고 예상할 수 있게 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컸다.
사람들은 일부를 보고 전체를 판단한다. 그건 자연스런 생존 본능이다. 고정관념도 비슷하게 작동한다고 한다. 매번 판단할 때마다 막대한 심리적 자원을 쏟아서 선택하는 일은 살아가는 일 자체를 너무 힘들게 하는 요인으로 적용한다. 몇번의 경험과 지식으로 미리 판단하는 게 보다 삶을 살아가기 쉬워진다. 차라리 그 에너지들을 아껴 다른 일에 투자하는 게 우리에게 도움이되는 일이다.
나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받은 명함 한장으로, 홈페이지 메인 이미지 한장으로 타이틀 카피 한문장으로 그 회사의 능력을 판단하기도 하고, 머리스타일이나 셔츠와 바지의 길이로 그 사람의 감각을 판단하기도 한다.
디자이너들이 명함 한장을 커피음료 정도의 비용을 들여서 만드는 이유도 명함 케이스, 펜이나 노트 한권을 고를 때도 마치 생존 장비를 갖추듯 비장하게 고르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것들 하나 하나가 우리의 감각을 보여주고 추구하는 가치에 대한 힌트를 주는 것들이니까.
브랜딩이란 행위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겪는다. 브랜드의 가치와 감각을 잘 설명할 수 있는 다양한 구성 요소들을 끊임없이 선택해간다. 그리고 그 선택의 합이 브랜드 고유의 스타일을 만든다. 브랜딩을 잘한다는 브랜드들을 보면 하나같이 개별적으로도 훌륭하고, 전체적으로도 조화롭게 고유의 스타일을 잘 선택하고 구성해 간다. 마치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신만의 스타일로 잘 갖춰 입은 사람처럼 말이다. 뽐내기 위해 보여주는 게 아니라, 전략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브랜드의 철학과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다.
이런 브랜드의 노력들은 결국 고객들에게도 도움을 준다. 그 스타일을 보고 자신에게 맞는지 맞지 않는지 더 빨리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고객에게 선택의 수고로움을 덜어주는 고마운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브랜드가 자신만의 고유의 스타일을 장착하는 일은 고객과 브랜드 양쪽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하겠다.
| 매거진 브랜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