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의 커서가 한자리에서 꼼짝 못하고 붙잡혀있다. 돌덩이처럼 딱딱해진 머리를 긴막대기 커서가 끊임없이 두드리는 기분이 든다. 기획서 첫장을 쓰기 위해 커서만 깜박이는 빈 페이지 화면을 마주할 때의 이 답답하고 막막한 심정은 아마도 누구나 한번쯤 겪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경험은 당연한 일일지 모르겠다. 기획하는 일은 어찌보면 참 재미없고 딱딱하다. 어떤 일을 설계하고 계획하는 일이라는 뜻이 담겼기 때문이다. 기획과 계획의 ‘획’에는 기본적으로 어떤 일을 한정하고 구분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렇게 구획이 정해진 틀안에서 자유로운 사고를 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한계들이 기획을 더 딱딱하고 고정되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면 기획을 할 때 어떻게 접근해야할까? 나는 그럴 땐 이 일이 '기획'이 아니라, '시나리오'를 쓰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건조했던 생각에 조금씩 촉촉한 물기가 생기기 시작한다. 흥미로운 이야기의 물길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다시 새하얀 기획서의 첫 화면으로 돌아가 보자. 기획자의 머리를 두드리던 커서의 긴 선이 면으로 변한다. 다시 동그랗게 변한 모양들은 몽글 몽글 공중으로 떠오른다. 더 높이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고, 다시 커서라는 비로 화면에 뿌려진다. 기획자의 생각들이 화면을 가득 적시며 채워나간다. 그렇게 만들어진 비옥한 화면의 대지 위에서 생각의 씨앗이 자라고 성장한다. 꽃을 피우고 열매을 맺는다.
어떤가. 기획에 대한 생각이 ‘커서’라는 소재를 통해 하나의 시나리오가 됐다. 기획자의 성장 스토리, 성공적인 기획서의 완성 과정이 눈 앞에 그려진다. 계획을 위한 기획이 아니라 상상력을 담은 기획으로 느껴진다.
시나리오화된 기획서는 그걸 작성하는 사람이 재미를 느끼기가 쉽다. 재미는 몰입도와 집중도를 올린다. 당연히 그 기획을 보고 읽는 사람도 흥미가 생긴다. 계획만 있는 기획보다 더 효과적인 설득력을 가진다. 더 쉽게 이해하게하고 더 큰 공감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