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모양 몸체에 레몬을 꽂으면 즙이 추출되는 주시 살리프를 디자인한 필립스탁은 2008년 은퇴 전까지 세계를 대표하는 디자인 아이콘으로 추앙받는 디자이너다. 그런 유명 디자이너가 영화관에도 안 가고, TV도 안 보며, 신문도 안 본다는 사실을 알고 정말 놀랐다. 디자인 프로젝트가 있을 때는 물과 전기도 안 들어오는 조그만 섬에 가있거나 숲 속에서 작업할 때도 있었다고도 한다.
파격적인 아이디어와 예술적 아트워크로 디자이너의 디자이너로 불리는 슈테판 자그마이스터는 7년에 한번 창조적 영감을 위해 1년의 안식년을 갖는다고 한다. 그 장소가 사람들로 붐비는 세계적인 대도시가 아닌 인도네시아 발리에 위치한 오지라고 해서 정말 의외였다.
디자이너라면 당연히 트랜드에 민감해야하고 새로운 것들을 끊임없이 받아들여야하는 직업인이기 때문에 응당 최첨단의 도시 문명 안에서 전시도 보고 카페도 가고 매월 쏟아지는 잡지들도 봐야하는 게 당연하게 생각했던 때였다. 그래서인지 이 두 디자이너가 일하는 방식은 천재들의 기행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처음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었던 이 두 디자이너들의 행동이 차츰 이해가 가기 시작하면서 보면서 내 생각에도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영감은 반드시 외부에서 온다는 확고한 믿음에 큰 균열이 생긴 것이다.
사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정말 좋은 영감은, 정말 필요한 아이디어는 밖이 아니라 안으로 부터 나온다. 밖에서 어떤 일들이 펼쳐지고 있는지를 살피는 일은 정말 중요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외부의 존재들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진 않는다. 더구나 요즘에는 하루에도 셀 수 없이 쏟아져 나오는 디자인 결과물때문에 그것들을 왠만큼 살피는 것조차 불가능해지고 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브랜딩 작업을 할 때 의무적으로 해왔던 유사 브랜드들의 레퍼런스를 모으는 일을 그만 두게됐다. 물론 꼼꼼히 레퍼런스를 찾아 근거를 만드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건 더 좋은 브랜드를 만드는 일이다. 그를 위해 레퍼런스를 모으는데 쓸 힘을 아껴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상하는데 쓰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을했다.
사실 디자이너라면 누구라도 트렌드를 둘러본다는 생각으로 핀터레스트나 세계 최대 디자이너 포트폴리오 사이트인 비핸스를 찾아보기 마련이다. 프로젝트를 시작하자마자 디자인 잡지부터 집어 들기도 한다. 물론 이 건 기획자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프로젝트에 대한 생각의 설계가 끝나기도 전에 무작정 구글 검색창부터 열어 보는 건 너무나 흔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레퍼런스를 찾고 본다고 과연 좋은 결과로 이어졌을까?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오히려 다양한 참고 사항들 때문에 더 헷갈리거나 심지어 카피하고 싶은 욕구까지 생길 때가 많았으니까.
이런 생각에 이르자 나는 몇년 전부터 유관 브랜드를 조사하는 일도, 핀터레스트나 비핸스를 뒤지는 일도, 잡지를 보는 일도 그만 뒀다. 처음에는 조금 불안하고 걱정됐지만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번거로운 과정이 생략되니 시간도 아낄 수 있었다. 당연했던 과정이 생략되어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게 처음에는 어색할 지경이었다.
처음부터 레퍼런스를 찾아보는 걸 멈춘 후부터는 대신 새하얀 화면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 위에 지금하는 프로젝트의 개념부터 적고 내 나름의 정의를 내려갔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가 만들어낼 성과와 목표를 명확히했다. 마지막으로 그거 어떻게 이뤄낼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생각나는대로 써내려갔다. 처음에는 막막했는데 내용이 점점 채워져 가자 프로젝트를 좀 더 상세하고 정교하게 진행해갈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이 익숙해지자 레퍼런스에 한정됐던 아이디어에서 벗어나 더 크고 넓게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 인터넷 화면 속에서, 잡지에서 보여주는 것보다 더 다채롭고 자유로운 아이디어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더 열심히 찾는 자료들은 디자인이나 이미지같은 시각 자료들이 아니라 브랜드와 관련된 사업 기획안이나 임직원들의 인터뷰, 각종 매체에서의 관련 뉴스로 대치됐다. 그렇게 모인 자료들을 꼼꼼히 분석하고 공부하다보면 그 안에서 또 새로운 아이디어나 디자인적인 영감도 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면서 어떻게든 외부에서가 아니라, 내부의 정보와 내재된 가치, 비전등에서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물론 그래도 막히거나 답답할 땐, 검색을 통해 다른 브랜드들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냈는지를 찾아봤다. 그럴 때도 그들의 디자인이나 스타일보다는 그 안에 담긴 맥락과 해결 방식을 참고했다.
아마도 필립스탁이나 슈테판 시그마이스터가 외딴 섬에 지내면서도 디자인 감각을 유지하고 뛰어난 아이디어를 내놓을 수 있었던 건 외부의 자극을 받아서가 아니라 자신들 안에서 영감을 끌어내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자기 안에서의 치열한 연구들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경이롭고 매력적인 창조성을 피어내지 않았을까 싶다.
이러한 점들은 디자인 뿐 아니라 사업을 하는데 있어서도 꼭 필요한 자세다. 남들이 하는 것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우리 안에서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에서 영감을 얻고 새로움을 발굴하도록 노력해야한다. 이런 자세가 하루 하루 쌓이고 몇년이 흐르다보면 그 때는 분명 일부러 달라지려 하지 않아도 레퍼런스에 의지하지 않아도 우리만의 사업, 우리만의 상품 영역을 구축할 수 있지 않을까.
[매거진 브랜디] 아래 링크 뉴스레터를 구독하시면 위와같은 콘텐츠를 1-2주에 한번 이메일로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https://maily.so/brandee